공자의 음악 말 1986년 6ㆍ7월
공자의 음악 말
인류가 살아온 발자취와 흔적을 글로 적어 놓은 것을 통틀어서 문헌이라 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인류사회의 과거에 있어서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을 기록한 문헌이 역사라면, 좁은 의미로는 광범한 역사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문물제도(文物制度)의 전거(典據)가 되는 기록, 또는 학문이나 예술연구에 자료가 되는 문서를 문헌이라 하겠다. 좀 더 범위를 좁혀서 말할 때 음악이 문서로 남아있다면 그것이 곧 음악문헌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음악문헌이 남아 있으며 특히 우리 나라에는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중에서 「악」(樂),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 [지봉유설](芝峰類設)과 널리 알려진 [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이 있다. 이중에서도 [악학궤범]은 우리 나라 궁중의 연례 의궤(儀軌)와 음악에 관한 귀중한 문헌이다.
[논어](論語)는 공자(孔子, Confucius BC 551~479)와 그의 제자들의 언행을 적어 놓은 경전이고 경서 문헌이다. [논어]는 [사서](四書: 論語․孟子․大學․中庸)와 [오경](五經: 詩經․書經․禮記․春秋․周易)의 으뜸으로써 유구한 세월에 걸쳐서 동양 사람들이 추구하는 생활의 덕목이 되어왔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사서오경]이 조선시대 과거급제를 위한 필수과목이었다.
여기서 [논어]를 쓰려는 까닭은 예(禮)와 관련하여 [논어] 속의 악(樂)이 진․선․미의 극치요 자연미에서 최상의 감화력을 지닌 언어들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예악(禮樂 social code of etiquette and music)이건데 예는 지고의 질서를 의미한다. 질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지극히 보편적인 사고와 분별력의 실천이며, 이 질서를 말-言-로 ‘논’(論)함이 곧 [논어]라 하겠다. ‘논’(論)은 따져서 옳음과 그름-正邪-을 가려낸다는 뜻이다. 공자는 이러한 예악으로써 인간성을 완성하고 국가를 통솔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에 성공하지 못한 공자의 심사가 그가 치는 경소리에 나타남이 [논어] 제14 헌문편(憲問扁) N0.41이다.
공자가 위나라에 있을 때 집에서 직접 경(磬)을 치는데 마침 그 집 앞을 지나던 나그네가 그 경소리를 듣고서 “마음에 품고 있음이구나. 자기를 알아줄 사람이 없으면 그만둘 일이지, 왜 경만 두드리고 있는가?”라는 뜻으로 공자를 힐난했다. 여기에서 공자가 손수 경을 연주했음을 보면 당시 중국 사회에 경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지나가는 사람조차 악기 소리를 이해했음은 당시 사람들의 음악 수준을 시사함이라 하겠다.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초나라의 거문고 명인이었던 백아(伯牙)는 그의 연주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자기의 음악을 알아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한 끝에 그만 거문고 줄을 끊고-伯牙絶絃-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아래 시호는 돌물 전인평 박사의 독특한 전인평 서체로 쓴 <백아와 종자기>의 episode이다.
연주자가 악기를 연주할 때 자기의 감정이나 해석을 표현하는데 이를 추창조(追創造)라고 하며 이것은 연주자의 인격과 결부된다.
편경(編磬)은 16개의 ㄱ자 모양의 경석을 음 높이의 순서로 매어 달아서 각퇴(角槌)로 친다. 우리 나라에는 고려 예종 11년(1116)에 중국 송나라에서 들어 왔다. 그 후 세종 7년(1425)에 경기도 남양에서 경석(磬石)이 발견되어 우리 나라에서도 경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편경은 현재도 <문묘제례악>과 <종묘제례악>에서 중요한 악기이며 <낙양춘>ㆍ<보허자> 등에도 편성된다.
그럼 [논어] 중에서 악, 즉 음악과 관련된 문단에 따라서 설명과 보충 사항을 덧붙이겠다. No.는 각 편(篇)의 문단 순서이다.
편경(編磬)
편경 틀 위에 새가 다섯 마리임은 오행(五行) 관련이며, 이것은 [악학궤범]
서문에서 “악(樂)이란 하늘에서 나와서 사람에게 깃든 것이요, 허(虛)에서
드러나 자연에서 이루어짐”(樂也者, 出於天而寓於人, 發於虛而成於自然)이라
는, 즉 신과 통함-神通-의 messenger요 상징이라 하겠다. 편경은 경석을 채석하여
만들어 보아야 비로소 그 성음(소리)를 알 수 있는데 1983년에 악기 장(匠) 남갑진이
경기도 남양의 경석으로 제작한 영남대 국악과 편경은 다행히 좋은 성음을 타고 났다.
2008. 6. 4. Sony DSC-V1 녹화/이해식.
第三 八佾篇 No.1
공자가 계씨를 탓하여 말하기를, “팔일을 뜰에서 춤추게 하다니,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면 그 무슨 짓인들 못할 것인가?” <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참고] 일무(佾舞)는 중국의 아악(雅樂)을 연주할 때 추는 춤이다. 아악은 아정한 음악이란 뜻이며 엄밀하게는 공자를 제사하는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을 가리킨다.
일무의 일(佾)은 열(列)이다. 한 줄(一)은 여덟 사람이 늘어서며 따라서 팔일무는 팔(八)열로서 64명이 추는 일무이다. 중국의 좌전(左傳)에 천자(天子)는 8일무(64명), 제후(諸候)는 6일무(48명), 대부(大夫)는 4일무(32명), 사(士)는 2일무(16명)를 추게 되어 있다. 일무는 1열이 여덟 사람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설과 체감되는 열수(列數)와 같다는 설이 있는데, 예를 들면 6일무는 48명이 아니라 36명이 춘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 명륜동의 성균관에서 매년 음력 2월(春)과 8월(秋)의 첫 정일(上丁日)에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위한 석전(釋奠)에서 문묘제례악을 연주한다. 그리고 매년 양력 5월의 첫 일요일에 서울 종로 3가 종묘에서 조선조 역대 임금과 그의 조상들을 제사하는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에서 일무를 춘다. 일무에서 문무(文舞)는 무공(舞工 dancer)이 문관을 상징하는 복색(服色)으로 오른손에 적(翟)을, 왼손에는 약(籥)을 들고 춘다. 무무(武舞)는 무공이 무관을 상징하는 복색으로 오른손에 척(戚)을, 왼손에는 간(干)을 들고 춤춘다.
계손씨(季孫氏)는 노(魯)나라 소공(昭公) 때의 한 낱 대부(大夫)일뿐인데 감히 천자의 예악을 남용했다. 이와 같이 사회질서를 파괴한 그가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는가? 과연 계손씨는 그후 소공(昭公)을 몰아냈다. 예나 지금이나 예(禮), 즉 질서는 사회를 아름답게 하는데 작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은 커다란 질서도 어지럽힌다는 비유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예악을 정치의 요체로 삼을 만큼 중요시 했으므로 「논어]에서도 팔일편을 위정편(爲政篇)의 바로 뒤에 배열해 놓았다.
<문묘제례악>에서의 烈文之舞. 紅紬衣를 입고 머리에 進賢冠을 쓰며
木靴를 신고 왼손에 약(蘥)을, 오른손에 적(翟)을 들고 迎新ㆍ奠幣ㆍ
初獻의 절차에 따라서 춘다. <孔夫子 誕降 2557年 秋期釋奠>. 2006. 9.
25. 서울 명륜동 성균관. Sony DSC-V1, 녹화/이해식.
第三 八佾篇 No.3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禮)를 갖추어서 무엇하며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음악은 무 엇할 것인가?”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참고] 공자는 성이 공(孔)이고 이름은 구(丘)이다. ‘구’(丘)는 그의 부모가 노나라에 있는 尼丘山에서 기도를 드린 끝에 얻었는데 그의 머리 가운데가 니구산처럼 들어 갔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자’(子)는 당시에 있어서 ‘선생’이라는 뜻을 지닌 남자에 대한 존칭이다. 자(字)는 중니(中尼)이다.
원문에 들어 있는 ‘인’(仁)은 人+人, 즉 두 사람(두 人)이란 뜻으로써, 서로 사랑하는 인간사회를 말한다. 이것을 바꾸어 보면 곧 공자의 중심 사상이 되는 휴머니즘(humanism)이다. 인간적인 사랑, 그것은 곧 음악이며 음악은 허공(하늘)에서 나와서 인간의 감정을 조화시키고 승화시키는 것의 표현인 것이다. 음악이 하늘에서 나왔거늘, 하늘에 제물을 바치고 하늘의 계시를 받아 하늘의 뜻을 따르지 못한다면 어찌 예와 악을 갖추었다 할 것이며 사랑이 있다 할 것인가?
악(樂)이란 하늘에서 나와서 사람에게 깃든 것이요, 허(虛)에서 드러나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여 피와 맥박을 뛰게 하고 정신을 유통(流通)케 한다(樂也者, 出於天而寓於人, 發於虛而成於自然, 所以使人心感, 而動盪血脉流通精神也[樂學軌範 序文].
第三 八佾舞 No.23
공자가 노나라의 악관(樂官: 師樂)에게 이르기를 “음악이란 가히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처음 연주를 시작할 때(ready) (모두가) 잘 맞추며, 이어서 가락이 뻗어 나가게 하며, 그러면서도 모든 소리들이 서로 엉기지 않고 맑게 하며 쭉 이어짐으로써 음악이 완성되는 것이다.” <子語魯大師樂, 曰 “樂 其可知也. 始作, 翕如也, 從之, 純如也, 皦如也, 繹如也, 以成.”>
[참고] 태사는 음악을 관장하는 벼슬이다. 흡(翕 또는 合羽)은 합하는 것(五音의 ensemble), 종(從)은 놓은 것(phrasing), 순(純)은 어울림(和: timbre), 교(皦)는 밝음(明: contrast)이며, 성(成)은 음악을 한 번 마침(cadence)이다. 본 항은 공자의 음악관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표면적으로는 음악의 연주법(playing)과 앙상블(ensemble)을 강조하고 있지만 공자의 국가관과 음악을 결부시키고 있다. 공자보다 2200여 년 이후에 공자의 생각과 비슷한 마테존(Mattheson, Johann 1681~1764)의 음악 말을 소개하면, “음악은 적당하게 쾌적한 음향을 현명하게 늘어놓아 옳게 서로 결합하고 동시에 좋게 만들어 내어 기분 좋은 음으로써 신의 영광과 모든 덕이 촉진되는 학문이요 예술이다.”
第三 八佾舞 No.25
공자가 순왕의 음악 소(韶)를 평했다. “아주 아름답고 아주 선하다.” 또 무왕의 음악에 대해서는 “아주 아름답기는 하나 아주 선함을 이루지 못했다. <子謂韶, “盡美矣, 又盡善也.” 謂武, “盡美矣, 未盡善也.”>
[참고] 요 임금을 이은 舜 임금은 덕으로 천하를 다스렸으므로(고대 중국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소위 堯舜時代라 함) 그 음악도 진선진미(盡善盡美)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왕의 음악은 진미하지만 주왕(紂王)을 쫓아내고 천하를 차지했으므로 비록 그것이 정의일지라도 그 음악이 진선(盡善)일 수는 없는 것이다. 미(美)는 소리의 모양이 선한 것이요 선(善)은 실질적인 아름다움이다.
第七 述而篇 No.13
공자가 제나라에서 머물렀을 때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 석 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음악이 이토록 훌륭한 경지에 이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
[참고] 소(韶) 음악은 앞의 八佾篇 No.25 에도 있다. “음식에서는 고기맛이 제일이겠지만 음악에서 풍류의 맛을 알게 되면 어찌 고기맛과 비교할 것인가.” 공자는 음악에 대한 식견도 넓었으므로 평화 시대 舜의 음악인 소(韶)를 능히 이해하고 배우며 음식 맛을 잊을 만큼 도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소(韶)라는 음악에 대하여 장자(莊子) ‘천지편’(天地篇)을 소개한다. “위대한 음악(요의 음악인 咸池나 舜의 음악인 大韶를 말함)은 속인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절양(折楊: 옛날 俗樂의 이름)이나 황과(皇荂)를 들으면 와 하고 웃어댄다. 그러므로 고상한 말은 속인의 마음에 들어가지 않는 법이니 진리의 말이 나타나지 않음은 상식들이 세상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두 길을 가려다가 홀리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천하가 홀려 있으니 내가 비록 안내자가 된들 어찌 도달할 수가 있겠는가?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 억지로 강행함은 또한 하나의 미혹이다. 그런고로 포기하고 추구하지 않음만 같지 못하다. 추구하지 않는다면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大聲不入於里耳, 折楊皇荂, 則嗑然而笑. 是故高言不止於衆人之心, 至語不出, 俗言勝也. 次二缶鐘惑 而所適不得矣. 而今也, 以天不惑, 子雖有祈嚮, 其庸可得雅?. 知其不可得也而强之, 又一惑也. 故莫若釋之而不推. 不推, 誰其比憂?>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은 음악에만 관심을 가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오늘날의 대중매체인 방송이 대중음악 위주로 흐름은 시대적인 요청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좋은 음악이라고는 할 수 없다. 노자(老子)는 좋은 음악이나 음식은 길가는 나그네를 멈추게 한다고 했다<樂與餌 過客止>.
第八 泰伯篇 No.8
공자 가라사대 “시로써 감흥을 일으키고 예로써 행동 규범을 세우며 음악으로 심성을 가다듬는다.” <子曰,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참고] 고대 중국에서 예(禮)ㆍ악(樂)ㆍ시(詩)는 교육의 중요한 내용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음악을 교육의 중요한 과목으로 삼은 일과 마찬가지다.
흥(興)은 일어남이다. 시는 그것을 읊는 사이에 억양이 반복되어 사람을 감동케 한다. 시의 억양이 음악에서는 리듬이다. 시와 음악에 관한 참고서로 서우석의 [詩와 리듬](서울:文學과 知性社, 1981)이 있다. 시는 음악 중에서도 성악(노래)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노래는 소리를 길게 내어 말함으로만 만족치 않아 그래서 이것을 차탄(嗟歎:소리의 dynamic?)하고 억양의 고하가 생겨난다. 그런데 차탄함으로만 만족치 않아서 나아가 손이 춤추고 발이 뛰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무도(dance)가 생기는 원인이다”(故歌之爲言也 長言之也 設之故言之 言之不足 故長言之 長言之不足 故嗟歎之 嗟歎之不足 故不知手之舞之 足之蹈之也).
[예기]의 인용문은 시가(詩歌)와 춤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함인데 자연스런 절주에 의하여 인간의 성정을 가다듬고 아름답게 함으로써 예(禮)의 근본을 삼을 수 있음이다. 예는 인간이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 하는 규범이므로 예에 의하여 행동하면 사물에 흔들림이 없는 분별력을 가지게 된다. 실천(立)하지 않는 예는 예일 수 없다(第十七 陽貨篇 No.11). 마찬가지로 시나 음악도 실천(興과 成)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는 그의 [시학](詩學)에서 시는 모방(imitation)으로부터 시작함을 주장한다. 모방한다 함은 어릴 때부터의 인간 본성에 내재된 것이며 이 점이 동물과 다른 것이다. 모방함과 화성(harmony)과 율동(rhythm)에 대한 감각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 바, 인간은 이와 같은 본성에서 출발하여 이에 점진적인 개량을 가함으로써 즉흥적인 것으로부터 시를 만들어 내었다. 고래로 동서양은 시와 음악이, 그리고 춤도 혼연일체였다.
노래와 춤에 대하여 朴相和(청주) 씨의 영가론(詠歌論)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영가는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어 근동아시아 지역에 퍼졌으나 중국에서조차 그 명맥을 잇지 못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金一夫(1826~1898)에 의해 시작되어 金昌夫(1863~1898)를 통해 朴相和에게 전수되었으나 오랫동안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영가는 역학(易學)의 음양오행을 소리로 나타내는 것이며 가사가 따로 없이 ‘음ㆍ마ㆍ어ㆍ이ㆍ우’의 5음만을 사용하고 춤(舞蹈)을 곁들임이 특색이다. 참선하는 것과 같이 가부자세로 앉아서 앞의 5음을 발성하는 것이 영(詠)이며 그 다음 가(歌)에 이르면 스스로 흥에 겨워서 노래가락이 흐르고 두 손으로 장단을 치게 된다. 더욱 흥이 나면 일어나 고개 짓을 하면서 두 팔을 내두르는 무(舞)에 이르고 더욱 더 나아가면 격렬한 몸짓으로 뛰는 도蹈)에 이르게 된다[詠歌舞蹈]. 기운이 다 하면 자세를 바로 잡고 앉아서 다시 영(詠)을 부르고 끝낸다. 영가를 처음 부르는 사람은 처량한 소리인 애원성(哀願聲)을 내게 되지만 차차 익숙해질수록 참회의 성(聲)과 감화성(感化聲)을 내게 되며 다시 신화성(神化聲)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第八 泰伯篇 No.15
공자 가로되 “노나라의 악사인 지(摯)가 처음 임관하였을 때 ‘관저’ 끝장의 악곡이 넘쳐흐르듯 아름답게 귀에 가득하게 들리는구나.” <子曰, “師摯之始, 關雎之亂, 洋洋乎, 盈耳哉!”>
第九 子罕篇 No.14
공자 말씀이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후에 음악이 바로 잡히고, 아(雅)와 송(頌)이 각기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子曰, “吾自衛反魯, 然後, 樂正, 各得其所.”>
[참고] 아송(雅頌)은 [시경](詩經)과 [예기]에도 나온다. 먼저 시경에서 여러 나라의 민요를 묶어 놓은 ‘풍’(風)이 160편, 왕실과 귀족의 생활시라고 할 수 있는 ‘아’(雅)가 105편인데, ‘아’(雅)는 다시 ‘소아’(小雅)와 ‘대아’(大雅)로 나뉜다. 사이좋은 부부를 금슬이 좋다고 말하는 妻子好合 如鼓瑟琴은 바로 [詩經] 「小雅」 常棣(아가위꽃)에 있는 성어(成語)이다.
그 다음 주(周)의 왕실과 건국조를 찬송한 ‘송’(頌)이 40편 들어 있다. ‘아송’은 곧 [시경]의 ‘아’와 ‘송’을 말한다. ‘아’(雅)는 ‘정’(正)의 뜻으로써 ‘아악’(雅樂 classic music)은 아정한 음악을 가리킨다. 여기서 아악을 classic music이라 했음은 격조(格調)있는 음악이라는 뜻이다.
[예기]에서는 선왕(先王)이 음악이 어지러워서 음외(淫猥)로 흐름을 미워하고 아송과 같은 바르고 우아한 음악을 제정했다는 것이다(先王恥其亂 故制雅頌之聲以道之~).
第十 鄕黨篇 No.10
공자는 마을 사람들이 나례(儺禮 악귀를 쫓는 푸닥거리)를 할 때에는 조복(朝服)을 입고 동쪽 층계에 섰다. <鄕人儺, 朝服而立於阼階.>
[참고] 나례는 섣달 그믐날 밤에 역귀(疫鬼)를 쫓기 위해서 행하던 의식이다. 이때 방상씨[方相氏: 구라의식(驅儺儀式)에 쓰이는 나자(儺者)의 하나. 장송(葬送)에도 방상을 사용한다]와 같은 험상스러운 가면을 쓰거나 가장을 하고 괴상한 동작으로 집안의 역귀를 쫓아내는 시늉이 연희적(演戱(的)이다. 나례를 대나(大儺)ㆍ구라(驅儺)ㆍ나희(儺戱)라고도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이후 계속 전승되어 조선조에서는 나례의식을 관장하던 관아(官衙)로서 나례도감(儺禮都監)이 있었다.
우리 나라의 장송 나례(葬送儺禮).
방상씨는 망자(亡子)가 무사히 저승에 가도록 횃불로 길을 밝히고,
험상궂은 탈에 칼을 들고 장애물을 제거하며, 즉 나례(儺禮)를 하면
서 장송한다.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진도 만가>에 나
오는 방상씨. 1978. 10. 20. 춘천 종합경기장.
Minolta Pocket 270 촬영/이해식.
第十一 先進篇 No.1
공자 말씀이 “옛날 선비들의 예악은 소박하였으나 지금 후배들의 예악은 군자적(君子的: 문화인다운)이다. 만약 내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한다면 옛날 선배들의 것을 쫓겠다.” <子曰 “先進於禮樂, 野人也, 後進於禮樂, 君子也, 如用之, 則吾從先進.”>
[참고] 예악은 내면적인 질과 외면적인 화려함이 서로 잘 어울려야 한다. 그러나 어느 한쪽을 택한다면 공자는 八佾篇 No. 4에서 “예는 사치스러운 것보다 검소해야 한다”(禮, 與其奢也, 寧儉)고 했듯이 차라리 야(野)할지언정 질(質)을 따르고자 했다(溫古). 이 말은 음악의 홍수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第十四 憲問 No.13
자로가 인간완성에 대하여 묻자 공자 가라사대 “장무중의 지혜와, 맹공작의 청렴함과, 변장자의 용감성과, 염구와 같은 재주를 갖춘 데다가 예악으로써 문화적 세련미를 갖추면 인간완성이라 할 수 있다.” <子路問成人. 子曰, “若臧武仲之知, 公綽之不欲, 卞莊子之勇, 苒求之藝, 文之而禮樂, 亦可以爲成人矣.”>
[참고] 장무중: 노나라의 대부
맹공작: 노나라의 대부
변장자: 노나라 변읍의 대부, 호랑이를 잡았다는 용감한 사나이.
제아무리 지성인이라 할지라고 예와 악을 갖추지 않으면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나라 옛 지성인의 보편적인 공간은 사랑방이었다. 이 사랑방을 갖추는 조건에 무려 60여 가지의 용구가 필요했는데 이 중에 거문고와 퉁소도 들어 있다. 중국 문화권이었던 우리나라의 지성인(선비)들도 예악을 갖추는 데는 결코 소홀함이 없었다.
第十四 憲問 No.41
공자가 위나라에서 경(磬)을 쳤는데 삼태기를 지고 공자가 묵는 집의 문 앞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마음이 있구나 경쇠를 침이여!” 조금 있다가 “비루하다, 고집스런 소리(땡땡소리)여! 자기를 알아줄 사람이 없으면 그만 둘 따름이지, 깊으면 옷을 벗고 건너고, 얕으면 걷고 건너는 것과 같구나!” 이에 공자가 말하기를 “과감하구나, 그렇게 하기는 어렵지 않지.” <子擊磬於衛, 有荷蕢而過孔氏之門者. 曰, “有心哉, 擊磬乎.” 旣而曰, “鄙哉, 硜硜乎 莫己知也, 斯己而己矣. 深則厲, 淺則揭.” 子曰, “果哉. 末之難矣.”>
[참고] [예기]에, 무릇 음은 사람의 마음에서 생기고, 악은 윤리(군ㆍ신ㆍ민ㆍ사물의 이치)에 통한다(凡音者 生於人心者也 樂者通倫理者也) 함은 연주자의 인격에 관한 말이다.
공자가 위나라에서 편경을 치고 있을 때 삼태기를 맨 사람이 공자의 집 앞을 지나면서 말하기를 “천하에 마음이 있구나, 편경을 침이여.” 이어서 “비루하구나 쟁쟁거리는 소리가, 세상이 자기를 몰라주면 물러나 있을 일이지, (시경에도 있듯이) 물이 깊으면 옷 벗고 건너고 물이 얕으면 바지 걷고 건널 일이지.” 이에 공자가 “과감하구나, 그렇다면 세상에 어려울 일이 없으리라”
삼태기((蕢)를 지고 가는 나그네-隱者-는 공자가 등용되지 못한 심사가 경소리에 흐름을 알고 “자기를 몰라주면 그만 둘 일이지 왜 저렇게 야단인가?”라고 공자의 태도를 비난했으니 이는 곧 공자가 치는 경소리가 공자의 마음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에 공자는 “그것은 과단성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만 두는 일은 쉬운 일이다.”라고 응수했음은 곧 사회악을 외면하고 자기 혼자만 은거하는 독선적인 태도는 쉬운 노릇이라는 역습이다.
第十五 衛靈公篇 No.10
안연이 나라 다스리는 일을 물으니 공자 말씀이 “하 나라의 때(역법)를 행하며, 은 나라의 수레를 타며, 주 나라의 면류관을 쓰며 악(풍류)은 곧 소무요, 정 나라의 음악을 몰아내고 아첨배를 멀리하라. 정 나라 음악은 음란하고 아첨배는 위태로우니라.” <顔淵問爲邦. 子曰 “行夏之時, 乘殷之 輅, 服周之冤, 樂則韶舞, 放鄭聲, 遠佞人. 鄭聲淫, 佞人殆.”>
[참고] 음란한 정 나라의 음악과 허튼 소리만 하는 자를 멀리 하라는 공자의 가르침은 민풍(民風)에 비생산적ㆍ비도의적ㆍ비성실적ㆍ비문화적인 요소가 끼어들어 타락한 풍조가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이다. 오늘날 음악의 공해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도 깊이 음미해 볼 만한 구절이다. 순(舜)의 음악 소(韶)에 대해서는 이미 第三 八佾篇 No.25에 있다.
한편 정 나라의 음악에 대해서 [예기] 「악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 나라와 위 나라의 음악은 난세의 음악으로써 만성(慢聲: 궁 상 각 치 우 五音이 어지러움)에 가깝다. 상간(하 나라의 폭군 걸왕의 음악)과 복상(은 나라의 폭군 주왕이 제정한 음악)의 음악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음악이다. 임금의 정치가 산만하면(거칠면) 그 백성이 유망(流亡)한다. 이런 때는 백성이 임금을 속이며 이를 막을 수 없다.”(鄭衛之音亂世之音也, 比於慢矣. 桑間濮上之音 亡國之音也. 其政散其民流. 誣上行私而不可止也〕[시경]에 있는 정 나라의 노래인 「정풍」(鄭風)과 위 나라의 노래인 「위풍」(衛風)의 시 내용도 아정한 것이 별로 없고 대부분 음미(淫靡)하여서 정 나라와 위 나라의 음악이 어떤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문묘제례악>에서 등가(登歌, 댓돌 위)에 설치된 편경과 그 오른 쪽에 가려져
있는 특경(特磬). 특경 위에 있는 세 마리의 새는 삼극(三極)인 천ㆍ지ㆍ인(天
地人)을 상징한다. <孔夫子 誕降 2557年 秋期釋奠>. 2006. 9. 25. 서울 명륜동
성균관. Sony DSC-V1, 녹화/이해식.
第十五 衛靈公 No.41
악사인 소경 면이 공자를 찾아오자 그가 층계에 이르면 공자가 “층계요” 라 하고 그가 자리에 이르면 “자리요” 하고 또 그가 자리에 앉자 공자는 “아무개는 여기 있고 아무개는 저기 있오” 하고 알려 주었다. 악사 면이 돌아가자 자장이 묻기를 “소경인 악사에게 말하는 길이 이런가요?” 이에 공자는 “그렇다, 바로 그것이 소경인 악사를 돕는 길이다.” <師冕見, 及階, 子曰, “階也.” 及席, 子曰, “席也.” 皆座, 子告之曰 “某在斯, 某在斯.” 師冕出, 子張問曰 ”與師言之道與?“ 子曰, ”然, 固相師之道也.”
[참고] [예기]에 악이란 베푸는 것, 즉 은혜를 베푸는 것이고 예란 보답하는 거, 즉 은혜에 보답하는 거(樂也者施也 禮也者報也)라고 했다. 진정한 애정으로 남에게 대함이 바로 예(禮)이다. 프랑스 어 etiquette(예절)에는 together(함께ㆍ같이ㆍ동반)의 뜻이 들어 있다. 공자는 소경인 악사와 함께 하면서 겸손한 예를 실천하고 보여준 것이다. 옛날 우리 나라에도 소경 악사가 있었으나 공자처럼 예절로써 대하지는 않았다. 판소리 <심청가>에서 심청의 아버지가 소경이며, 우리 나라의 모든 산대놀이(山臺戱 탈춤)에 소경이 나온다. 소경 악사에 대하여 宋芳松, [樂掌謄錄硏究](경산:嶺南大出版部, 1980), 253~54쪽 참조.
第十七 陽貨篇 No.11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예라 예라 하지만 그것이 구슬이나 비단만을 말하겠는가? 또 음악이라 음악이라 하지만 종이나 북만을 말하겠는가?” <子曰, “禮云, 禮云, 玉帛云乎哉! 樂云, 樂云, 鐘鼓云乎哉!”>
[참고] 사람으로서 인자하지 않으면 예는 무엇에 필요한가? 사람으로서 인자하지 않으면 음악은 무엇에 필요한가?(第八 泰佰篇 No.3: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예악이란 형식도 필요하지만 예악의 바탕인 경건함과 인자함이 합친, 참으로 인간적인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고 가르친 것이다. 종고(鐘鼓)는 중국에서 귀족들만 다룰 수 있는 타악기였다.
第十八 微子篇 No.9
태사 지(摯: 第八 泰伯篇 No.15에 나옴)는 제 나라로 갔고, 아반 간은 초 나라로 갔고, 삼반 요는 채 나라로 갔고, 사반 결은 진 나라로 갔고, 북치는 방숙은 하내로 들어갔고, 작은 북(鼗)을 흔드는 무는 한중으로 갔고, 소사 양과 경쇠를 치는 양은 바다 섬으로 갔다. <大師摯適齊, 亞飯于適楚, 三飯繚適蔡, 四飯缺適秦, 鼓方叔入於河, 播鼗武入於漢, 少師陽, 摯磬襄, 入於海>
태사: 노나라 악관의 우두머리
아반: 악관명, 亞는 차(次)의 뜻
삼반: 반과 같은 악관명
도(鼗): 손잡이가 달린 북이며 북을 흔들면 북에 달린 채가 북을 쳐서 소리남
소사: 악관을 돕는 조수
[참고] 노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여러 악관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문화의 상징인 아악이 쇠퇴하고 악사들이 흩어졌다는 것은 예악의 문화적 덕치가 쇠미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유능한 음악가가 여러 곳으로 흩어지는 것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다. 히틀러의 독재를 피하여 독일의 많은 음악가들이, 그리고 공산주의 러시아의 국적을 버린 음악가들이 예술가의 천국인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삼국사기] 「악지」에 의하면 가야국의 악사 우륵은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미리 알고 가야금을 들고서 신라 진흥왕에게 망명하여 국원(國原: 현재의 충주, 충주에 있는 탄금대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면서 살던 유적)에 살면서 법지ㆍ계고ㆍ만덕이란 세 제자를 길렀다. 우륵의 제자들이 임금 앞에서 그들의 음악을 연주하니 임금이 무척 기뻐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그 음악은 멸망한 가야국의 것이니 취할 것이 못된다고 아뢰니 이에 임금은 그것은 가야왕이 음란해서 스스로 망한 것이지 어찌 음악이 죄가 되겠는가. 대체로 성인이 음악을 제정(制定)함은 인정에 연유하되 표절(撙節)케 하는 데 있거늘 나라가 잘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워지는 것은 음악과 연유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우륵의 음악을 권장함으로써 후에 큰 음악(大樂)으로 발전되었다(…後于勒以其國將亂, 携樂器投新羅眞興王… …王受之, 安置國原, 及遺大奈麻法知․階古․大舍萬德傳其業, 王聞之大悅. 諫臣獻議, 加耶亡國之音, 不足取也. 王曰, 加耶王淫亂自滅, 樂何罪乎. 蓋聖人制樂, 緣人情以爲撙節, 國之理亂不由音調, 遂行之, 以爲大學…).
예(禮)와 정치에 음악을 결부시킨 공자의 음악관을 부정하는 사상으로써 [묵자](墨子)의 「비악편」(非樂篇)을 들 수 있다. 비악(非樂)이란 음악을 부정한다는 뜻이다. 음악이란 공연히 사람의 마음만 흔들어 놓을 뿐이지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음악예술] 1986년 6ㆍ7월호(Vol. 10ㆍ11), “음악과 논어” 를 수정.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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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芳松, [樂掌謄錄硏究], 경산:嶺南大出版部,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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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熹(韓相甲 譯), [論語ㆍ中庸], 서울: 三省出版社, 1985(19版).
車柱環 譯, [論語], 서울: 乙酉文化社, 1983(21版).
裵宗鎬ㆍ安炳周ㆍ金學圭 譯, [韓非子ㆍ荀子ㆍ墨子], 서울: 三省出版社, 1979(15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