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풀린 젓대굿(연주회 평). 1985년 10월
9월 24일 저녁 대구의 동아문화센터 스타홀에서 있었던 경북대 국악과 이동복 교수의 대금독주회는 한마디로 말해서 잘 풀린 젓대(大?)굿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음악에서 전개와 변주를 ‘풀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이날 정악의 정수로만 짜여진 프로그램을 점입가경으로 풀어가는 풀이의 감흥이 썩 한갓지게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이 연주회에서는 경풍년과 유초신지곡 중에서 상영산, 염양춘과 중광지곡 중에서 하현환입ㆍ염불환입ㆍ타령ㆍ군악, 그리고 요천순일지곡ㆍ함녕지곡 등 모두 6곡이 연주되었다. 국악연주회라면 의례히 전통음악과 새로운 창작국악으로 대칭을 이루거나 정악과 민속악으로 프로그래밍 하는 것이 상례지만 이 교수는 순수한 정악으로만 엮은 하루 밤 거리의 연주 순서를 충분한 저력으로 감당해 내었다.
정악에는 특정한 악기를 위한 독주곡이 따로 없으며, 대개 어느 악기에 잘 어울리는 곡을 독주곡으로 연주한다. 이날 연주된 곡 중에서 경풍년ㆍ유초신지곡 중 상영산ㆍ염양춘ㆍ요천순일지곡 등은 정악대금의 독주곡으로 널리 연주되는 곡으로, 한국 정악의 특징의 하나인 아주 느리면서도 자유로운 한배(pace)가 주는 텅 비어있음의 직관적 관조의 맛을 만끽시켜준 곡이었다.
이 교수의 젓대 연주는 댓속에서 울려나오는 높고 아름다우면서도 애절한 음색으로 끊일 듯 말 듯 들릴 듯 말 듯한 가운데 높고 낮은 성음으로 굽이쳐 흘러 마치 대나무의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것 같았다. 한국전통음악 표현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요성(搖聲)ㆍ전성(轉聲)ㆍ추성(推聲)ㆍ퇴성(退聲)이 시간의 흐름과 변화무쌍한 가락과 함께 다이내믹하게 어우러졌다.
이날의 선곡(選曲)을 살펴보면, 높은 음역과 낮은 음역으로 된 곡을 번갈아 엮었으며, 음계를 달리하는 곡들을 교차하여 배치함으로써 분위기의 변화를 갖도록 했다. 또한 네 번째 곡인 중광지곡 중 하현환입~군악은 가야금ㆍ거문고ㆍ피리ㆍ해금ㆍ장구의 반주로 연주되었는데, 이것은 대금독주만으로 연주할 때에 오는 단조로움을 피하고, 다양한 템포 및 장단과 음량의 변화, 그리고 정악대금과 다른 악기와의 조화를 청중(감상자)들에게 들려주려는 의도(배려)는 성공적이었다고 하겠다.
이 동복교수의 젓대 솜씨는 유초신지곡 중 상영산에서 무르익기 시작하여 요천순일지곡에서는 그 절정을 마음껏 힘차게 분출되는 순간을 맞이하였다. 가볍게 흐르는가 하면 어느덧 깊음 속에 빠져있고 사라지는 듯 싶더니 어느새 휘몰아 오는, 전설에서 중국 요나라 때 하늘의 소리요 순나라 시대의 찬란한 태양빛을 상상하게 하는, 참으로 청아스러운 누리의 요천순일지곡이었다.
이 교수는 그의 프로필에 보이듯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서울대 및 동대학원을 거쳐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과 국립국악원 전속연주단에서 대금 연주원으로 근무한 바 있고, 정농악회의 회원과 한국정악원의 이사를 역임하고 공주사대 음악교육과의 교수를 거쳐 현재 경북대 국악과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악계와 교육계(학계)에서 열심히 일해오고 있다.
그는 젓대 명인 녹성 김성진과 죽헌 김기수에게서 대금 정악을, 한범수에게서 젓대산조 가락을 착실히 이어 받으면서 제 나름의 삶의 건강한 냄새를 스며들게 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이 교수는 지금 고악보의 발굴과 연구에 몰두하는 국악학자이지만 원래 그의 본령은 뛰어난 젓대재비이다. 이 날 그의 독주가 빛날 수 있었음은 젓대꾼의 본 바탕에 학자적인 노력이 융합되어진 때문이리라.
정악은 편성이나 악기 매체에 따라서 음악이 다르게 풀어지는데 이 교수는 이러한 풀이 과정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젓대로 풀어가는 음악소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조용한 실천으로 보여 주었다.
판소리에서 소리를 할 수 있는 경지에 듬을 득음(得音)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정악젓대의 진정한 경지에 듬을 덕음(德音)이라 친다면, 이동복 교수는 이 덕음을 공개함으로써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이번 연주회는 모처럼 이 지방에서 가졌던 뜻 깊은 연주회가 아닐 수 없다. 전통음악을 사랑하는 애호인들 뿐만 아니라 이 길에 정진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겐 전통 본연의 진가를 찾을 수 있게 하는 좋은 기회를 주었다. 입추의 여지없이 만장한 청중에게 전통음악의 음색과 아름다움으로 충만하여 심취케 하였으며, 그들에게 우리 것이 정말 좋다고 하는 자부심과 절대심을 넣어 준 연주로 평가하며, 이렇듯 수준 높은 연주회가 자주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