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문화 예술·

달구벌 소리, 1985년 7월

노고지리이해식 2008. 4. 21. 09:22

 

                  

 

 

   대구시립국악단의 제3회 정기 연주회가 5월 13일 저녁 대구시민회관에서 성황을 이루었었다. 우선 넓은 무대 위에 펼쳐진 대형 병풍이 국악연주회다운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내어서 청중에게도 한결 아늑한 느낌을 주는 듯 했다. 병풍은 단지 장식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옛날 사랑에서 풍류를 연주 할 때에는 실제로 음향판 구실도 했었다.

   우리나라의 음악은 樂(기악)ㆍ歌(노래)ㆍ舞(춤)의 삼방(三方)이 한데 어울러져야 비로소 완전함을 이루게 되는데, 이날 대구시립국악단의 연주회는 이에 더하여 병풍에 쓰인 文(글: 樂學軌範 序文)ㆍ書(글씨)와 함께 오방(五方)이 되어서 모처럼의 음악적 정감이 무르녹는 듯한 밤이었다. 더구나 첫 곡인 수제천(壽齊天)은 신라 헌강왕 때부터 유래되는 처용무(處容舞)의 춤음악으로써 이 춤의 중요함은 五方(東 ․ 西 ․ 南 ․ 北 ․ 中央)을 상징하는 다섯 사람이 춤을 추는 것이다. 오행(五行)과 통하는 처용무의 오방과 연주회의 오방이 상통되어 수제천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먼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듯 마치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강력한 기상(氣象)에 흡입되어 각 악기들 사이에 일어나는 음정의 부조화도 별로 거슬리지 않았다. 다만 이렇듯 삼매경(三昧境)이 도중에서 깨어나 버린 아쉬움은 수제천의 진수라 할 3장과 4장을 들어보지 못하고 맛보기로만 그쳐버린 탓이라 하겠다.

   프로그래밍이란 배열의 기술이다. 동일한 재료를 가지고도 제작자에 따라서 청중이나 관중, 또는 시청자에게 주는 느낌이 달라질 수 있음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덟 스테이지(stage) 중에서 세 스테이지가 영산회상과 관계되는 곡이었으며 두 스테이지의 정재(呈才, 궁중무용)가 모두 녹음 테잎에 의한 반주여서 일면 프로그램의 짜임새와 연주 밀도가 아쉬웠다. 이와 같이 진행상의 돌연한 번화가 올 때 프로그램 전문가들은 ‘튄다’라는 관용어를 쓴다.

   올드리치에 의하면 춤이란 음악과 함께 두 가지 예술의 혼합체로서 보고, 듣고, 읽을 수 있는 예술이라 했다. 깔끔한 춤사위의 검무와 율동적인 유모어의 포구락(抛毬樂)이 스테레오도 아닌 튀는 음악으로 인하여 듣는 즐거움이 반감되었다. 따라서 앞으로는 직접 무용 반주를 하는 일이 대구시립국악단의 당면 과제라고 본다. 비록 고전적인 정재라 할지라도 보다 해석적인 분절화(分節化)의 구성이었더라면 우리 시대의 친근한 감각으로 춤을 읽는 즐거움이 더 배가 되었으리라.

   세악 천년만세(千年萬歲)는 영산회상의 후행 조건(后行條件 consequent)로써 전반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는 배려로 배열 된 감이 있다. 연주자 사이의 호흡이 조금 어긋나고 양청도드리에서 빠른 템포가 주는 흥취가 덜 했지만 연주에 정성을 기울이는 모습이 여실했다.

   유일한 성악프로였던 관산융마(關山戎馬)는 서도(西道: 황해도ㆍ평안도) 사람들의 구수한 인간미가 담긴 시창(詩唱)으로써 독특한 콧소리가 매력적이다. 음조를 원래대로 올려서 불렀더라면 서도창의 낭낭한 멋이 한층 더했을 것이 분명하다.

   가야고 독주곡 숲은 황병기 교수가 1963년애 발표한 출세작으로써 자연주의적인 명곡이다. 원래 독주곡인 작품이나 산조를 흔히 제주(濟奏 unison)하는데 이것은 음색의 변화 없이 음량만 증가시키고 넓은 무대를 채운다는 의도 외에는 별다른 예술적 의미가 없다(만일 어떤 피아노 곡을 열사람이 똑같이 unison을 연주한다고 생각해보라) 가야금 독주곡으로서의 오묘한 미분음 처리와 절묘한 농현을 어찌 획일적인 unison으로써 표현할 수 있겠는가?

   대구시립국악단은 1984년 9월 17일 창단연주회에서도 가야금 제주(unison)로 역시 황병기 교수의 침향무(枕香舞)를 무대에 올린 바 있는데 이러한 선곡은 개개인의 연주 능력 향상에 관계됨과 동시에 레퍼토리의 기획에 보다 더 노력해야 함을 드러낸다. 한 가지 보기로 창단 연주회 때의 취타(吹打)나 1984년 12월 11일 제2회 정기연주회 때의 만파정식지곡(萬波停息之曲)은 동일한 곡이다. 전자는 속명(俗名)이고 후자는 아명(雅名)인데 이렇게 동일 곡을 이름만 바꾸어 프로그래밍하는 일은 앞으로 대구시립국악단의 명제가 무엇인가를 역력하게 말해 준다.

   후반 대미(大尾)를 장식한 평조회상은 병풍에 씌어진 [악학궤범]의 의연한 서문 내용을 웅변이라도 하는 듯 역동적인 흐뭇한 감흥에 이끌리어 사ㆍ죽(絲竹) 사이 음량의 차이조차도 느껴볼 겨를이 없었던 게 아닌가! 특히 피리가 힘차게 쇠는 일품 가락은 달구벌에 남성적인 풍류를 한껏 불어내었으니 이 소리가 하늘에서 나와서 사람에게 이르고 허공에서 생겨나서 자연에서 이루어지니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고 정신을 유통시키는 것이라, 이것이 악학궤범의 서문이요 이날의 평조회상이 이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고 뉘라서 고개를 흔들겠는가?

   달구벌 국악단의 탄생은 만시지탄이나 아직은 미래가 창창한 젊은 대학생이 주축이어서 대구시민이 지금보다 국악을 더 사랑할 때 달구벌의 소리는 더 멀리 여울져 가고 향토 국악사에 그 흔적이 남을 것이다.

[음악예술], 1985년 7월     

 

 

 

참고문헌

Virgil Charles Aldrich(金文煥 譯), [예술철학], 서울: 玄岩社, 1977(2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