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가-발렌타이 데이- (95.3㎒ 대구 MBC-FM fan, 1988년 3월호, 12~13쪽)
국악의 이해
사랑가-Valentine's Day-
1988년 3월호
글ㆍ사진/이해식
매년 2월 14일이면 <발렌타인 데이>(Saint Valentine's Day)라 하여 젊은 남녀들이 스스럼없이 서로 초콜릿 선물을 주고받는다. 우리에게 2월 14일은 별스런 날이 아닌데도 이 날이 다가오면 장사꾼들이 적극적으로 발렌타인날을 부추겨서 초콜릿을 아주 비싸게 판다. 그 뿐인가 하면 말하기 좋아하는 방송사들도 이 날이 오면 무슨 명절인 양하여 하루 종일 젊은 남녀의 사랑과 초콜릿 선물을 들먹거림이 마치 부화뇌동(附和雷同)함으로 보인다.
발렌타인 데이는 269년경에 순교한 로마의 성자(聖者) 발렌타인을 기리는 뜻으로 유럽 사람들이 매년 2월 14일을 축일로 정하여 애인끼리 서로 사랑의 선물이나 연애편지(love letter)를 주고받음이 풍습이 되어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날만은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해도 괜찮다는 관습에 편승하여 상인들이 극성스러운 판매작전을 편다. 특히 이웃 일본에서 2월은 일년 중에 장사가 가장 침체되는 달이므로 장사꾼들이 이 사랑의 날을 이용하여 매상고를 올리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흉내 내고 있지만기실 우리나라의 풍속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차라리 발렌타인의 날 근처에 있는 민속의 날(음력 설날)이나 정월 대보름이 우리의 진정한 명절이요 사랑의 날이라 하겠다.
참고로 발렌타인은 큐피트(Cupid), 즉 사랑을 나타낸 그림이나 감상적인 시구(詩句)가 적힌 카드나 그 밖의 선물을 뜻한다. 여기서 큐피드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비너스(Venus)의 아들로서 사랑을 맺어주는 신을 뜻하기도 한다. 흔히 큐피드는 날개가 달린 나체 미소년이 활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며 큐피드의 황금 화살을 맞은 사람이면 누구나 사랑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큐피드는 그리스 신화에서는 에로스(Eros)로 불린다.
공휴일로 지정된 크리스마스는 기독교 신자든 아니든 이제 누구에게나 즐거운 명절이 되었음에 대하여 비록 젊은이에게만 한정되었더라도 발렌타인의 날까지 별스런 명절로 들떠서야 되겠는가?
우리나라는 조선조를 통하여 생활화된 유교의식의 하나로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을 해석하기에 따라서 남녀가 요즘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일곱 살에 다달으면 정말로 한 자리에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남녀 격리를 주장한다기 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일생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 하는 도덕성 또는 윤리를 가르침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사실 유교는 우리 민족의 자유분방한 기질을 몇 백 년 동안 묶어놓긴 했지만.
모내기철은 부엌의 부지깽이조차 바쁘게 쓰인다는 속담이 생길만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의 노동력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농번기인지를 알 수 있다. 노소(老少)는 물론이고 남녀를 구별할 겨를이 없는 때가 바로 모내기철이다.
모내기철은 남녀노소 구별 없이 부엌의 부지깽이조차 바쁘게 쓰인다는 농번기이며
마을의 광장을 이룬다. 경남 고성농요 현지 발표공연 -영남농요 큰잔치-에서 모찌기..
2005. 6. 23.
허리를 굽혀서 모를 쥔 손가락을 논바닥에 꽂는 노동이 비록 힘에 겨울지라도 종아리에 질벅거리는 흙탕물의 감촉이 싱싱하게 느껴져서 피로가 덜어진다. 그러나 그보다도 평소에 그리워하고 보고 싶던 처녀가 모내기철만은 예외 없이 깊은 규중(閨中)을 벗어나 울타리를 박차고 논바닥으로 나와서 함께 모를 내니 총각들의 가슴이 어찌 설레지 않겠는가?
상주야 하첨산 공갈 못에
연밥 따는 저 처녀야
연밥 줄밥 내 따줌세
세간살이 내캉하자
초롱아 초롱아 청사초롱
임의 방에 불 밝혀라
임도야 눕고서 나도 눕고
서로 우러러 녹아들고
위에 소개한 가사는 영남지방 일원에서 불리어지는 모내기 노래이지만 그 내용은 사랑가(戀歌 love song)이다. 이와 같이 힘드는 농경 노동으로써 모내기나 논매기 노래의 사설이 오히려 남녀간의 절실한 사랑을 서정적으로 희구함은 미구에 풍작을 기원하는 간접적인 주술성(呪術性)이라 하겠다. 한편 아래는 남녀의 사랑을 더욱 솔직하게 표현하는 대구 대명동에서 수집된 모심기 노래이다.
유자 탱자 은은히 맞어
한 꼭대기에 둘이 여네
신랑 각시 은은히 좋아
한 벼개에 둘이 눕네
위와 같은 사랑가가 들녘을 펴져나가는 사이에 이웃 처녀들을 실컷 바라보노라면 처녀들은 실쭉해지고 어느덧 모판에는 모가 다 심어져 있다.
하천산 공굴 밑에
알배기 처녀가
총각총각 낚시 총각
알배기 처녀를 낚어내라.
알배기 처녀! 꽃다운 나이의 성숙한 처녀는 곧 싱싱한 젊음의 상징이요 인생의 힘이 솟는 샘이다. 알배기란 알이 꽉 들어서 배가 부른 물고기를 가리킨다. 이렇게 포동포동한 처녀를 총각낚시로 낚아 내자는 논바닥 위의 유머러스(humorous)한 사랑가!
이렇게 사랑가 드높이 울리는 모내기철의 들녘은 남녀노소가 모이는 농경 광장이요 곡식을 관장하는 땅의 신-地神-과 인간이 접신(接神)하는 계절인 것이다. 서울의 여의도광장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고 많은 사람이 유동(流動)하지만 모내기 광장에서 흐르는 인정과 화목은 없어 보인다. 땅바닥은 모조리 아스팔트를 발라 놓아서 땅의 신과 접촉할 수도 없다. 그러나 흙탕물 튀기는 논바닥과 흙먼지 나는 밭일지라도 거기에는 인정의 풍성한 카오스(chaos)가 있고 땅을 일구고 직접 밟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catharsis)가 있으니 이것은 오직 농부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모내기판은 본격적인 농사와 사람이 어우러지는 카오스의 현장이다. 여기서 카오스는 단순한 혼돈의 의미를 넘어서 알배기 처녀처럼 논두렁이 넘치도록 알짜 농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농부의 기대심리라 하겠다.
호미와 손으로 논바닥을 훑고 다니거나 흙을 뒤엎는 논매기는 벼농사에서 가장 힘드는 노동이다. 그래서 그런지 논매기 노래에 따르는 사설은 더욱 관조적이며 관능적인 사랑가이다. 아래 사설은 임실 사람들이 논맬 때 부르는 방아타령인데 이태릭 볼드체와 같이 띄어쓰기에 따라서 의미가 아주 달라진다.
강변 멀리로 가는 처자 속곳 사이 아래를 들고나 간다.
또는
강변 멀리로 가는 처자 속곳 사이 아래를 들고 나간다.
그런가 하면 아래와 같이 매우 풍자적인 사설은 논매는 노동 피로를 감소하는 데 아주 적절하다.
활 잘 쏜다 활 잘 쏜다
부뚜막의 군사가 활 잘 쏜다
李海植, 국악관현악곡집 [海東新曲](慶山: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3), 74쪽에서 퍼옴. 이 책의 82쪽에 있는 「합창과 국악관현악을 위한 ‘밧삭’」은 <임실방아타령>을 소재로 변주한 작품임. 「밧삭」은 KBS가 제5회 아세아음악제전에 출품하여 전통음악에 의한 작곡으로 특별상을 받은 작품이다. 1979. 12. 9. Baghdad/Iraq.
거개의 논매기소리에서 방아타령을 부름도 방아거리가 많도록 역시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주술성이라 하겠다.
원시 농경사회로 올라갈수록 여성은 생존을 위한 번식과 풍요의 상징이 된다. 위에 소개한 대구시 욱수동의 모심기 노래는 단순히 알배기 처녀와 낚시 총각이 사랑하는 차원을 넘어서 통통한 물고기가 무수한 알을 낳아서 퍼뜨리는 듯이 농사도 풍년이 들어서 흡족한 풍요를 누릴 수 있기 바라는 기원도 들어 있음이다. 이러한 뜻에서 사랑가는 풍성풍요를 바라는 노래라 하겠다. 그래서 판소리 흥부가에서처럼 아이를 많이 낳아도 다 제 먹을 것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전해옴으로 본다.
그러나 이제는 농촌도 급속하게 도시화되어가고 인심이 건조해진지 오래여서 옛날처럼 격양가(擊壤歌) 부르며 농사짓던 시절이 아님은 우리가 민속적인 생활에서 점차 멀어지며 희미해져가고 있음이다. 이런 틈에 서양풍습인 발렌타인날이 오늘날의 도시 청년들에게 감각적으로 더욱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런지? (95.3㎒ 대구 MBC-FM fan, 1988년 3월호, 12~13쪽, 「사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