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전성시대(Confucianism)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공자의 전성시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이해식-
아래 재생기의 starter(▶)를 double click하여 문묘제례악 <응안지악>을 들으면서 읽으세요.
文廟祭禮樂 - 凝安之樂
國立國樂院, 韓國音樂選集 제12집(1983), LP disk 2, side 2, track 2.
演奏 國立國樂院
(지구레코드사 제작)
한국 사람이라면 태어나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공자(孔子 Confucius 552~479 BC)의 전성시대(Confucianism) 안에 들어 있다. 이런 공자의 논리적인 말(logion)을 모은 [논어](論語 the Analects of Confucius)에는 음악에 관한 기사가 소홀치 않게 들어 있다. 이 중에 <헌문>(憲文) 41편에 다음과 같은 <편경>(編磬 stone chimes)에 관한 일화(逸話 episode)가 있다.
第十四 憲問 No.41
子擊於衛, 有荷蕢而過孔氏之門者. 曰 “有心哉, 擊磬乎.” 旣而曰 “鄙哉, 硜硜乎 莫己知也, 斯己而己矣. 深則厲淺則揭.” 子曰 “果哉. 末之難矣.” 선생께서 위나라에 계실 때 경(磬)이란 악기를 치셨는데 삼태기를 지고 선생이 묵는 집의 문 앞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말했다. “마음이 있구나 경을 침이여!” 조금 있다가 “비루하다, 고집스런 소리여! 자기를 알아줄 사람이 없으면 그만 둘 따름이지, 깊으면 옷을 벗지 않고 건너고, 얕으면 걷고 건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때 공자왈 “그것은 과단성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만 두는 것은 쉬운 일이다(그러나 나도 그렇게 하기엔 어렵지 않다).”
1. 삼태기(簣)
공자는 그가 출생한 노나라와 위나라를 자주 왕래했는데 위와 같이 위나라에서 편경을 치고 있었음은 당시 고대 중국 사회에 편경이 널리 보급되었음이라 하겠다.
여기서 나의 관심꺼리는 공자의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삼태기를 어떤 형태로 가지고(荷簣) 가는지이다, 삼태기는 볏짚으로 엮어서 곡식이나 물건을 나르는 농경사회의 생활도구이다. 이 삼태기는 <자한>(子罕)편 18장에도 나온다. 나는 유년 시절에 종종 이런 삼태기 심부름을 한 적이 있다.
왼쪽 볏짚으로 엮은 망태기(구럭)는 오늘날 시장바구니 같은 생활도구이며, 꼴망태는 소에게 먹일 꼴을 베어 담았을 때이다. 오른쪽 삼태기는 삼각모양이며 위에서는 관광용으로 두 개를 포개었음,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 2011. 8. 10.
내가 알고 있는 국내 대부분의 [논어]는 <하>(荷)를 <지고>, 또는 <메고>로 번역하고 있다. <지고>는 등에 질 것이고 <메고>는 어깨에 멜 것이다. 공자가 연주한 편경과 우리나라에 전래된 오늘날의 편경이 동일함으로 보면 중국과 우리나라 농경사회의 삼태기도 동일한 모양으로 본다. 그래서 두 손으로 들어야 할 삼태기를 등에 지거나 어깨에 메었다면 그것은 멜빵(sustained)이 있는 구럭(망태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자>(微子)편 7장에서 멱서리(蓧)를 지팡이에 걸머지고 가는(以杖荷蓧) 표현으로 보면 망태기로 보인다. 어쨌거나 <헌문>편에서 <궤>(蕢)로써 분명히 삼태기임을 밝혔으니 공자의 집 앞을 지나간 사람은 두 손으로 삼태기를 든 농부가 아닐까 한다.
이 농부 과객(過客)은 공자가 등용되지 못하여 자기의 이상적 이념을 실현하지 못하는 심사가 경소리 속에 흐름을 알고 “자기를 몰라주면 그만 둘 일이지 왜 저렇게 야단인가?” 하고 공자를 조롱한다. 이처럼 음악을 알아챔을 <지음>(知音)이라고 하는데, 종자기(鍾子期)가 백아(伯牙)의 거문고 음악을 알아본 지음 고사(知音故事) <백아절현>(伯牙絶絃)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고사성어(故事成語)이다.
헌문 41편 마지막에서 “深則厲淺則揭”는 [시경](詩經) 패풍(邶風) <포유고엽>(匏有苦葉)에서 원용한 구절이다. 이 구절 다음에 <果哉>의 <果>를 일본 학자 미야쟈끼(官崎)는 벌거숭이 <나>(裸)로 해석하여 홀랑 벗는 것도 어렵지 않음이라고 풀이한다(金鍾武, 321쪽). 참고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경을 칠 놈”이라고 할 때의 <경>은 바로 편경을 가리킨다.
2. 편경
편경(編磬)은 ㄱ자 모양으로 음율(音律)에 맞도록 깎은 16개의 경석(磬石)을 음 높이(音高 pitch)대로 편경틀(架子)에 매어 달아서 각퇴(角槌 horn stick)로 친다. 또 여기서 저기만큼만 옮기려도 일단 16개의 경석을 멘 끈을 다 풀었다가 다시 메어야 하는 육중하고 거대한 악기이다.
공자가 위나라에서 연주했던 고대 중국의 편경과 오늘날의 편경은 동일하다. 위 왼쪽은 악기장 남갑진(南甲振 1943~1994) 씨가 경기도 남양의 경석으로 제작한 영남대 국악과의 편경인데 다행히 좋은 소리를 타고 났다. 오른쪽은 편종. 이 둘을 묶어서 종경(鐘磬)이라고 부른다(2008. 6. 4).
우리나라에는 고려 예종 11년에 중국 송나라에서 들어 왔다. 그 후 중국에서 수입하는 편경만으로는 부족하던 차에 세종 7년(1425)에 경기도 남양에서 양질의 경석(磬石)이 발견되었다. 이에 세종이 남양 경석으로 새로 제작한 편경소리를 듣고 아홉 번째 <이칙>(夷則)소리가 높다고 지적함에 그 경석을 살펴보니 과연 먹줄이 남아있어서 악기장(樂器匠)들이 먹줄이 없어질 때까지 깎아내자 비로소 소리가 맞았다고 하는 일화는 [세종실록](世宗實錄) 권59에 기록된 사실(史實)이다. 이로 보면 세종은 예민한 음감(音感)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음악가였다.
아악(雅樂=祭禮樂) 타악기에는 어김없이 솟대가 얹어져 있는데 편종과 편경에도 꼬리를 하늘로 높이 쳐든 공작 솟대가 가시적(可視的)인 오행 관련으로 앉아있다. 이 솟대들은 신을 위한 제례악이 신에게 잘 전달되게 접신(接神)하는 상징적인 새들이다. 나는 이런 솟대 새를 음악새(musical birds)라고 부른다.
편종과 편경은 예나 지금이나 공자일가를 제향하는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과 이성계와 역대 조선왕들을 제향하는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은 물론, 현대적인 창작음악에서도 중요한 악기이다.
문묘제례는 지금까지 매년 음력 2월(春)과 8월(秋)의 일진(日辰)으로 <정>(丁)이 들어있는 날에 서울 명륜동 성균관 대학교 안에 있는 성균관(成均館)에서 거행했음은, <丁>이 고대 중국 사람들의 갑골문에서 태
양을 향한 제단( )이 상형(象形)된(심재훈, 281쪽) 글자인 까닭으로 본다. 그런데 이런 택일은 매년 날짜가 바뀌므로 금년(2011)부터는 양력으로 매년 5월 11일과 9월 28일로 고정되었다. 9월 28일은 1952년에 자유중국에서 공자의 탄강일(誕降日)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이다. 한편 종묘제례는 진작부터 매년 양력 5월 첫 일요일을 정하여 서울 종로3가 종묘(宗廟)에서 거행한다.
한편 종묘제례는 진작부터 매년 양력 5월 첫 일요일에 서울 종로3가 종묘(宗廟)에서 거행한다.
문묘(文廟)와 종묘(宗廟) 제례악은 댓돌 위에 등가(登歌)와, 뜰(마당)에 헌가(軒架)를 진설(陳設)한다. 그러니까 상하로 두 개의 악단(연주 그룹)을 편성하여서 교대로 연주한다.
서양에서는 베네치아 악파(Venezin school)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 교회에서 제단의 양편에 있는 오르간과 바닥 쪽에 있는 두 개의 오르간, 발코니에 두 개의 합창단이 서로 공간적으로 분리되어(corispezzati)서 교대로 합창하기도 하고 모두 함께 불러서 거대한 음향을 만들어내었다. 이것은 16세기 중엽에 시작된 일이니, 동양과 서양음악에서 성부(聲部 part) 개념의 시대적 차이라고 하겠다.
<종묘 제례>를 위하여 헌가(뜰)에서 편종을 진설하고 등가(댓돌)에서 편경을 진설하는 사람들.
등가와 헌가는 서로 반제적(反題的)으로 연주되지만 투쟁적이지는 않다. 2008. 5. 4. 서울 종로3가 종묘.
3. 제례악
<응안지악>(凝安之樂)은 문묘 석전(釋奠)에서 영신(迎新)과 송신(送神)으로 연주하는 음악이다. 이 음악은 너무 고전적이어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부제(副題)를 달았지만, 또한 외국 사람들이 듣고서 너무 놀란 초현대적인 음악이기도 하다. 전라도 농촌의 속언인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이 몰래 이듬해에 농사지을 씨나락(벼 종자)을 까먹으려면 그 소리가 오죽 하겠는가. 요즘말로 하면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 정도라 할까... 전라도 민속음악은 악절(phrase)의 끝을 밑으로 흘러 내려서(slide down) 슬픔을 표현하지만 <응안지악>이 종경(鐘磬) 위의 봉황 솟대처럼 악절의 끝을 높게 쳐들어 냄은 신 지향적이라 하겠다.
국악의 특징으로 흔히 <악ㆍ가ㆍ무>(樂歌舞) 일체를 말하는데, <악ㆍ가ㆍ무>가 일체되는 음악은 오직 제례악을 가리킨다.
4. 성균관
현재 문묘 제례가 거행되는 성균관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모였던 학문기관이이었으니 오늘날의 국립대학이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내가 17년전 1994년 5월 25일에 대구에서 발행되는 [영남일보] <문화산책>에 썼던 “600년”이라는 컬럼 한 꼭지를 소개한다.
6백년
(1994. 5. 25)
이해식(영남대 음대학장ㆍ국악작곡)
1994년은 서울 정도 6백년이며 <한국방문의 해>요 6백년보다 더 전통 있는 <국악의 해>여서 바야흐로 세계 속의 한국답게 무척 분주하게 돌아간다. 그윽한 한국음악을 들으며 고색이 창연한 서울이나 경주를 여행해 본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정취인가? 그러나 뒤 돌아 보면 서울은 북새통이고 경주는 콩크리트 덕지 속에 신라의 맥이 겨우 숨 쉬고 들리는 국악은 자칫 터미널 뮤직(terminal music 관광음악) 뿐일 때가 적지 않다.
각설하고 나는 정도(定都) 6백년과 관련하여 6백년이 넘는 국립대학이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고려시대의 국립대학이랄 수 있는 국자감(992년)을 이어받은 조선시대의 성균관(1398년)이 지금의 국립대학으로 이어졌다면 우리도 파리대학(1215년)이나 옥스포드대학(1249년)보다 훨씬 더 유서 깊고 자랑스러운 국립대학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학문과 과외열풍에 시달리는 사회양상도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최대의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1946년)의 전신은 경성제국대학(1924년)이다. 어찌하여 일본의 제국대학이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이라는 케치프레이즈를 가진 명문 서울대학교로 이어졌는지, 그것은 분명한 일제잔재 중의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겠다. 일제의 잔재가 어디 그 뿐일까? 지금도 각급 학교에서 부르는 교가는 일제의 군가 풍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 있고 방송사나 언론사에서 계절 따라 벌이는 가곡의 밤 따위의 곡목들도 친일파 음악가의 작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잔재현상들은 “짚고 넘어간다”는 속담을 가진 우리가 정작 짚어 보아야 할 것을 소홀하게 넘긴 결과는 아닐는지?
참고 문헌
[동아원색대백과사전] 16ㆍ17권, 서울: 동아출판사, 1986.
李基白, [韓國史新論], 서울: 一潮閣, 1990.
경성제국대학교를 이은 서울대학교 본관이던 이 건물은 현재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예술가의 집>으로 운용되고 있다(서울 혜화동 2011. 7. 18).
참고문헌
金鍾武, [論語新解], 서울: 民音社, 1989.
심재훈, [甲骨文], 서울, 民音社, 1990.
朱熹ㆍ韓相甲 譯, [論語ㆍ中庸], 서울: 三省出版社, 三省版世界思想全集 1, 1985(19版).
車柱環 譯, [論語], 서울: 乙酉文化社 乙酉文庫 22, 1983(21版).
釋奠祭를 올리는 성균관 입구(서울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2008. 5. 11).
孔子 일가를 祭享하는 釋奠祭는 지금까지 음력 2월(봄)과 8월(가을)의 日辰으로 첫 <丁>이 들어 있는 날에 거행했다. 이런 택일은 <丁>이 고대 중국 胛骨文에서 태양을 향한 제단(祭壇)이 상형된 문자임과의 관련으로 본다. 그러나 2011년 석전부터는 매년 양력 5월 11일과 9월 28일로 고정되어서 기억하기 쉽다(成均館 02-765-0501). 이 석전제에서 文廟祭禮樂을 연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