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식 작곡 [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두레 제2번] 리허설(성남
이해식 작곡 [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두레 제2번] 리허설
시승격 40주년기념 성남작곡제전
2013. 6. 16.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
성남시립국악관현악단 리허설
▼ 이해식 작곡 [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두레 제2번'] - 녹화 1(피아노 건반쪽)
성남시립국악관현악단. piano/이향아, 지휘/김만석
▼ 이해식 작곡 [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두레 제2번'] - 녹화 2(지휘자쪽)
성남시립국악관현악단. piano/이향아, 지휘/김만석
미리보기(preview 아시아음악학회에서. 2013. 6. 14)
※ 아래 <미리보기> 내용은 2007년도의 <
국립국악관현악단 제45회 정기연주회 프로그램>에서 퍼온 기사에 사진과 동영상을 더한 것임.
― 작품소개
두레(durae)는 농사 지을 때 물을 퍼 넘기는 각추형의 농구이다. 두레질은 두레끈을 잡은 사람의 힘이 균형을 이루어야 두레에 담긴 물이 출렁거리지 않고 물을 데는 관개(灌漑) 노동의 효율도 올릴 수 있다. 또 다른 의미의 두레는 농사 협동을 위한 결사(結社 circle)로써 이때 풍농을 위한 두레굿이 펼쳐진다.
▼ 두레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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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 [水利民俗圖錄], 金提: 東津農地改良組合, 1984. 이해식, [작곡노트 넘겨보기](경산: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6), 42쪽에서 퍼옴.
▼ 두레 동영상(충남 서산 사람들)
두레질은 음악의 앙상블(ensemble)과 같아서
두레꾼이 호흡을 맞추고 두레줄을 당기는 힘이 균형을 이루어야만 관개(灌漑) 능율이 오른다.
그러니까
위 작품은 piano와 국악관현악과의 두레질이며 앙상블이 된다.
이런 뜻에서
나의 모든 작품의 후경층은 농경의 두레 정신이며,
<두레>라는 낱말이 작품의 곡목으로 쓰인 게 여럿이다.
그리고
농경사회에서는 두레 結社가 종종 있었다.
어느 樂團이든 이런 두레 結社와 같다고 본다.
고대로부터 우리나라 곳곳에 세워진 솟대는 장대를 세우는 입간(立竿) 민속으로써 마을의 태평과 풍농을 보장하는 수호신의 성격을 띠고 있다. 솟대에 물새를 얹어 놓음은 물새가 하늘과 땅과 물에서 하늘(신)과의 통신이 가장 자유스러운 messenger(antenna)이기 때문이다. 바로 아래 사진들이다(우리 나라 아악 타악기에는 모두 새가 올려져 있다).
▲ 피뢰침 솟대. 2003. 9. 22. 안양 인덕원
▲ 가로등과 솟대.2004.10. 6. 제45회 한국민속축제/부여 백마강변 구드레(가로등은 밑을 밝히는 솟대이며, 솟대는 위로 통신하는 안테나이다)
▲ 현대 도회의 안테나 솟대. 2008. 5. 6. 군포시
▲ 보안등 솟대. 2005. 4. 1. 경남 하동
▲ 이해식 작곡 [춤덜구]. 한국현대음악앙상블(CMEK). 2003. 8/24~25. 국립국악원 예악당
▲ 실내장식 <희망의 솟대>. 2013. 5. 31. 과천
무당(shaman)이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 ―神通者― 라는 고대적 의미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의 「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두레 제2번」에서 열린 피아노는 하늘을 향한 솟대이며, 독주자는 건반으로 신에게 모르스 부호를 연타(連打)하는 무당이다. 이때 나의 작품은 오로지 무당만이 통신하는 굿책(굿을 하는 文書)이 된다. 이러한 나의 다른 굿책으로 「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두레 제1번」(2000)ㆍ「플루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두레맞이」(2001)ㆍ「국악원 삼바 ―그리움으로 부르는 노래―」(2003)ㆍ「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질내기」(2004) 등이 있다.
<춤두레=춤+두레>임은 두레굿의 중심에 춤이 있어서이다. 「춤두레 제2번」은 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동ㆍ서의 두레질이다. 두레질을 하는 중에 서양악기(pianoㆍoboeㆍviolin cello)와 국악관현악이 복조(複調 poly tonality)로써 마치 두레 속의 물이 출렁거림처럼 충돌하기도 한다.
피아노는 삼바(samba) 리듬이어서 alla samba(삼바와 같이)를 악상으로 썼다. 삼바는 무의식적으로 아프리카에 관한 생각이었으며 잘 알려지지 않은 슬픈 열대(부라질 내륙)를 생각나게도 한다.
지금까지 열거한 두레ㆍ솟대ㆍ무속, 이러한 item들은 「춤두레 제2번」에서 직접적으로 표상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을 쓰는 동안의 깊은 생각들이었다. 「춤두레 제2번」은 전통과는 사뭇 다른 음악 풍농을 거두고자 하는 현대의 풍농 두레굿이다(이해식).
작곡가 소개 ―이해식
1943년 전라북도 부안에서 출생한 이해식은 전후(戰後) 한국 농촌사회의 민속적인 환경을 접하며 성장했다. 전주 사범학교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1965년 서양음악작곡과 한국음악이론을 복수로 전공할 수 있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 입학했다. 국악과 소속이었으나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했던 서양음악 학습을 주로 했고, 대학원에서도 양악 작곡공부를 했다. 즉, 내적으로는 한국의 토속정서를 체험했으면서도 서양 전통의 작곡기법을 두루 섭렵했던 것이다. 그 결과 대학 4학년이던 1968년 동아콩쿨에서 한국 음악콩쿨 최초로 서양작곡 부문과 그 해 신설된 국악작곡 부문에서 동시에 입상 했다. 1970년대 KBS-FM 국악방송 프로듀서 시절, 그는 방송을 제작하기 위해 향토음악을 직접 채집하기도 했고(아래 사진), 밤에는 창작에 전념하며 작곡가로서의 신념을 잃지 않았다. 「해금을 위한 상」(像爲奚琴, 1977), 「해동신곡」(海東新曲, 1979)과 같은 수작(秀作)들이 이 시절에 탄생했다. 1981년 영남대학교 국악과 교수로 부임한 이해식은 일련의 ‘굿’ 음악들을 내어 놓고, 1986년의 무용조곡 「흙」을 기점으로 무용을 위한 음악창작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현재 영남대학교 명예교수인 그는 댄스스포츠로도 수준급이다.
이해식은 의자에 앉아서 머리로 곡을 쓴다기보다는, 부단히 떠다니며 몸으로 곡을 쓰는 작곡가로 다가 온다. 이러한 성향은 현장의 소리를 채집하여 작품의 재료로 응용한다거나, 음악 속에서 추구하는 춤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모습에서 역력히 보인다. 창작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1968년부터 2006년까지 약 40년 동안 무려 117 곡을 생산해 낸 이력에서 엿볼 수 있다.
▲ Fieldwork.. 경남 통영군 욕지면 동학리 西村부락(욕지도)을 답사하는 이해식. 1983. 2. 17. 촬영/한별.
섬에 갈 때는 사전에 기상사태를 알아두고 충분한 여비와 겨울철에는 방한복 등을 준비해야 한다.
▲ '춤두레' 미리보기.설명. 아시아음악학회. 20013.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