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원

해설: 창작판소리 논평과 질의. 1990. 10. 19.

노고지리이해식 2006. 8. 2. 20:17
 

 

 국립국악원 학술회의 논문집  '90 - Ⅱ (1990. 10. 19. 국악당 소극장)



           제 3 주제

 

<창작판소리와 관련된 제문제>에 대한 질의 논평


李 海 植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속도가 빠른 변화의 시대이며 동시에 모든 분야에서 모색의 시대이다. 이 시류(時流)에 따라서 우리 나라의 음악도 20년 30년 전 보다는 훨씬 중흥의 시기에 접어들어 있고, 북한과의 문화 교류도 외래 음악보다는 우리 나라의 전통 음악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오늘 학술 대회의 <판소리의 진흥과 발전>이라는 논제에 맞추어 질의 논평자는 본문의 모두(冒頭)에서 <國樂>(국악)이란 말 대신 <우리 나라 음악>이라고 들고 나왔다. <우리 나라 음악>이든 <國樂>이든 그게 그거 같지만 본인은 좀 더 의미를 달리 하고자 해서이다.

<國樂>은 누구나 알다시피 <韓國音樂>(한국음악)의 준말이요 주로 해방이후부터 쓰여 왔다고 한다. 본문의 실마리를 여기서부터 잡아갈까 한다.

한문에서 <큰 입구(口)변>(또는 에운담변)은 거의 어느 범주에서나 울타리를 뜻하며 <國>()이란 글자의 고전적 풀이도 여기에 속한다. 즉 고대 중국에서 나라 <國>은 창()을 든 사람(口: 입구)이 울타리(囗 : 에운담) 안의 땅()을 지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國樂>이란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 갇혀진 좁은 의미의 음악이라고 말한다면 그다지 견강부회(牽强附會)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국악은 해방이후 외래문물의 도래 속에서 우리 전통음악을 보호해야 한다는 능동적 의미로 쓰였는지 아니면 울타리 속에서만 머물러 있으라는 피동적 의미로 쓰였는지 잘 모르겠으나 나는 <國>이란 글자 속에 들어 있는 쇼비니즘(chauvinisme)만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모든 생활이 다양하고 급하게 돌아가는 이 시대에 있어서의 <國>의 지나친 강조는 문화의 중흥에 제동 역할만 할 따름이다. 오늘날 <國>에서의 탈출에 거듭난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이 시대의 우리의 삶에서 외래 문물의 도래는 옛날보다 훨씬 다변화되었고 내부의 사정도 변화되고 있다. 따라서 항상 열려있는 태도로 변화의 문제꺼리를 우리 것으로 만드는 데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옛날 우리의 선조들이 대륙을 통해서 들어온 음악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지혜를 남긴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명제에 <창작 판소리와 관련된 제문제>를 발표한 임진택씨의 의견에 찬사를 보내고 논평자의 질의와 의견을 말하고자 한다.

논제에서 언급된 <열사가>는 70년대에 내가 KBS 재직시에 제작 방송한 바 있고 주로 명창 박동진씨가 <이순신장군> 등을 부른 것을 기억한다.

판소리의 재미는 골계(滑稽)에 있다. 골계는 <춘향가>의 어사 출도와 같은 catastrophe에서 절정을 이룬다. 판소리의 매력은 <심청가>와 같은 비극적 catharsis에 있다. 판소리의 환상적 착각은 심청의 재생설화나 수궁가와 같은 fiction에 있다. 그런데 안중근․유관순․이봉창 등의 열사들은 실제의 인물들이며 사실의 기록을 남긴 nonfiction들이다. 그리고 옥중에서 죽었기 때문에 전통의 판소리 줄거리처럼 권선징악(勸善懲惡)을 겸한 happy ending이 어렵다는 것이 catastrophe나 catharsis는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모르나 결말에 오는 가장 중요한 재생(rebirth)이나 환생의 plot 처리에 어려움이 없지 않다. 판소리는 긴 줄거리를 <풀이>와 <놀이>로 이어가는 연극적 요소도 함께 가지고 있다. <열사가>는 얘기꺼리로서 풀어갈 수는 있겠으나 원초적 <놀이>로써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된다.

<5월 광주>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event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호감이 가는 첫째 이유는 음악인의 현실 참여의식이다. 19세기 이탈리아에서 G. Puccini(1858~1924)나 R. Leoncavallo(1858~1919)의 opera가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작품이 현실주의(現實主義 verismo)였기 때문이다. 현실주의 차원에서 본다면 <열사가>보다는 <5월 광주>가 시간적으로 우리의 감각에서 훨씬 가까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오월 광주>의 논급에서 발표자는 <파격>(破格)이란 단어를 썼는데 나는 이 단어에 특별히 주목하고자 한다. 파격이란 격식 또는 어떤 틀을 깨뜨린다는 뜻이 되겠는데 파괴는 건설의 어머니라는 항간의 속어와 맥을 같이할지? 어쨌든 무형의 건물을 그대로 둔 채 새로운 건물을 지을 수 있음이 무형문화의 특징이 아닐까 한다.

판소리 창자의 복장과 무대 장치의 파격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파격은 판소리 자체이다. 전통 판소리를 보면 수시로 변화되는 창법과 쪼(調)를 읽을 수 있고, 미미하지만 가사의 변모를 찾을 수 있다. 창법과 쪼는 삽입가요와도 관계가 된다(<춘향가>의 농부가, <수궁가>의 시조창 등). 가사의 변화는 <흥보가>에서 볼 수 있는데 보기를 들면 아래와 같은 제비의 강남 환국의 점고 대목이다.


1) …노국 갔던 분홍제비 나오, 중원 갔던 초록제비 나오, 만리 조선 갔던 흥보제비 나오. [李昌培, [韓國歌唱大系](서울: 弘人文化社, 1976) p. 544]


2) …노국 갔던 분홍제비 제 일착으로 들어오고, 당나라 갔던 명매기는 제 이차로 들어오고, 조선 갔던 흥보제비… [朴憲鳳, [昌樂大綱](서울: 國樂藝術學校 出版部, 1966) p. 324]


3) 일본 들어 갔던 초록제비!…, 중국 들어갔던 명매기…, 미국 들어 갔던 분홍제비!…, 조선서 태어난 흥보제비! [박봉술창 <흥보가>『뿌리깊은 나무 판소리』음반 둘째장 B면 (서울: 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82) p. 55]


판소리의 발생 시기인 조선시대에 노국(러시아)이나 미국이란 나라가 가사에 삽입될 만 지금처럼 국제적인 영향은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가사의 변화는 근세의 일이라 하겠다. 김소희씨의 <흥보가>에도 제비점고에 미국이란 나라가 나온다. 여기서 흥보가의 사설을 거론한 것은 판소리에서 우선 가사가 변모되거나 윤색되는 것이 창작 판소리의 첫 관건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판소리의 모든 면은 변화되어야 한다. 판소리뿐만 아니라 특히 TV나 공연 무대에 올려지는 우리 나라 음악에 관련된 복장이나 발림이나 춤이나 창법이나, 모두 현실에 입각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 판소리의 색채적 변화는 삽입가요로써 쉽게 시도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을 나는 가지고 있다. 발표자는 <5월 광주>에서 민요연구회가 창작했다는 <남도의 비>, <광주천> 등의 가요를 삽입함으로써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비록 unison의 형태이지만 간간히 합창을 삽입하여 좋은 break(急轉)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러한 시도로 미루어 보면 조용필ㆍ이선희 또는 주현미ㆍ현철의 노래들이나 멀리 Michael Jackson이나 실비 바르땅(Sylvie Vartan)의 창법과 노래, 춤을 현실적인 판소리에 삽입시키는 데에 주저할 이유는 없다. 여기서 현실적인 판소리라 함은 story를 가진 판소리뿐만 아니라 같은 범주에 드는 단가로써 명승고적이나 자연주의의 고전적 가사보다도 오늘 우리의 감각에 맞는 짧은 판소리, 즉 현대의 단가 개발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된다. 여기서 잠깐 한때 유행했던 이선희의 <아! 옛날이여>를 한 번은 melody를 판소리 style로 부른 것을, 또 한 번은 창법을 바꾸어서 가야고 병창으로 여러분께 들려 드림으로써내 주장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얻고자 한다[[노래방대백과](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94), 358쪽]. (판소리와 가야고병창은 김성녀).

 

 


 

 

     나는 앞에서 파격이란 말에 주목했고, 이것은 평소 나의 창작기저에 자리 잡고 있는 생각의 하나이다. 무엇인가를 깨뜨려도 그것이 항시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파격이 아무리 거듭되어도 그것은 전통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나의 생각이다. 지금까지 삽입가요와 짧은 판소리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판소리의 진흥>이란 논제에 비추어 발표자의 의견을 구한다. 지금 여기서 Michael Jackson이나 이선희를 들먹거린 것은 대중가요 길이의 판소리, 즉 단가의 개발은 물론 이런 style의 음악을 삽입가요로 정착시킴으로써 대중 접근을 시도하고 경드름․석화제 등 판소리의 여러 창법마냥 새로운 판소리 창법을 출발하는 시초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데 여기에 대한 발표자의 의견을 듣고자 한다.또 <오월 광주>를 공연한 발표자의 의지로 이와 같은 시도를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믿는데 필연적으로 닥칠 판소리 바닥의 저항이 있다면 어떻게 대처할 지 고견을 듣고 싶다.

판소리는 철저한 성악이요 vocal technique이 유별스럽다. 성악의 연마 과정은 변성기가 문제꺼리로 등장한다. 논평과는 다소 거리가 멀지만 판소리 교육에 있어서 변성기는 어떻게 처리되는지 친절한 설명을 바란다. 이 질문은 왜 하는고 하니 최근 전주 KBS주최로 전국 어린이 콩쿨이 해를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어린이의 판소리에서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저리 가거라 뒷태를 보자…


와 같은 가사보다도 어린이의 감각에 맞는 동요 판소리랄까, 어린이 판소리 교육에 도움이 되는 방안이 있으면 설명해 주기 바란다.

나는 박초월씨의 생전에 북쪽 지방(함경도 등)의 판소리 공연에서 청중들의 무반응을 얘기 들은 바 있는데 이와 같이 판소리의 지역적 한계성을 극복할 방법이 있는지 듣고 싶다. 발표자는 <똥바다>의 demonstration으로써 세간의 강한 주목을 받은 바 있는데 판소리 창작에서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창작의 과정 또는 형태이다. 즉 oral composition으로써 무형의 창작을 하는 것인지, paper composition으로써 유형의 작품을 남기는 것인지 궁금증을 풀어보고 싶다. 판소리 부르는 사람을 광대라고 한다. 광대의 현대적 의미는 talent라는 통상적 image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판소리라는 음악은 현재의 모든 상황을 수용하는 동시에 변모를 거듭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 나라의 모든 음악이 <國>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올 때 새롭게 거듭나리라고 강조하고 싶다. 지나친 <國>은 자폐증과도 상통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