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겨울방학 가정 통신문. 1995. 1.
잔디를 위한 편지
('95 겨울방학 가정 통신문)
사랑하는 음대생 여러분! 긴 겨울 방학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방학은 학교생활과 강의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학창 시절에만 맛 볼 수 있는 추억이요 특권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긴 겨울 방학을 음대생 여러분은 의미 있게 보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생동감이 넘치는 학교는 언제나 젊은 학생이 그 원천입니다. 방학이란 그 생동력을 재충전하고 재창조의 추진력을 쌓아가는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생명력이 넘치고 재창조의 기상이 솟구칠 개강이 기다려짐은 젊은 여러분들만의 특유한 매력 때문일 것입니다.
▲ 나의 수첩에 쓴 忍ㆍ仁 ㆍ人.
1994. 3. 17.
저는 작년에 저의 수첩에 참을 인(忍)ㆍ어질 인(仁)ㆍ사람 인(人)이란 세 글자를 커다랗게 써 놓고 학장에 부임했습니다. 이 세 글자는 모두 보편적인 뜻을 가지고 있으니까 자세한 설명을 안 해도 되겠습니다만 저의 학장 재임 기간뿐만 아니라 일생의 좌우명을 삼아도 손색이 없을 글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연습실에서, 잔디밭에서, 주차장에서, 학교의 어느 곳에서든지 여러분들을 나무라고, 꾸짖고, 또 자주 야단쳤습니다. 그러고 뒤돌아서서 위의 세 글자가 적힌 수첩을 들쳐보며 큰소리를 치지 않고도 얼마든지 대화를 할 수 있었는데…, 저의 방법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었다고 번번이 후회하고 반성을 반복하면서도 잔디밭을 가로 건너는 학생을 보면 또 큰 소리를 치곤했습니다.
별로 대단치도 않은 한 뙈기의 잔디밭을 가지고 제가 왜 그토록 극성을 부리겠습니까? 그것은 음대 건물이 들어선지 십여 년이 되어 가는데도 조그만 잔디밭 하나 제대로「일구어 내지 못하면서」어찌 아름다운 정서의 세계, 예술의 세계, 음악의 정신, 음악의 생명을 운운하고 학문(學問)한다는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꽃밭이 없는 아파트의 주거 구조에서 성장한 대다수의 여러분에게 잔디 보호라는 표어같은 말은 별다른 실감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성인이요 지성인이므로, 그리고 또 음악대학생이므로 자기 주변의 모든 사물에 무관심할 때가 아닙니다.
저는 앞에서 ‘일구어 내지 못하면서’ 라는 부정적인 어휘를 썼는데 이것은 땅을 일구고 작물을 가꾸는 일이나, 음악이라는 학예를 일구고 인간성을 가꾸는 것이 마찬가지라는 긍정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이 긍정으로 가득 찬 인생의 황금기를 지내는 여러분을 볼 때 저에겐 여간 큰 부러움이 아니랍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봄이면 (위를 향하여) 새싹이 트고 가을이면 (아래로) 잎이 지는 우주의 아름다운 주기(週期)를! 우리의 잔디밭에서도 어김없이 보이는 이 주기가 음악의 시초랍니다.
이번 1학기엔 애창되는 가곡처럼 푸른 잔디 위의 아지랑이를 기대해 보고 2학기엔 낙엽이 딩굴도록 그냥 두고 봅시다. 몇 걸음 안 되는 잔디밭을 질러간다고 무엇이 얼마나 빠르겠습니까? 그것은 무심(無心)의 모습일 따름이요 그저 하릴없는 심리적인 이익일 뿐입니다. 그러면 음대생 여러분! 서로 건강한 모습으로 개강 때 만납시다. 그리고 더 열심히 합시다.
1995. 1.
영남대학교 음악대학장 이해식
▲ 내가 학장임기를 마친 이후 울타리나무가 심어지고 학생들이 잔디밭을 출입하지 않아서
2006. 9.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