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言語)와 노래(1984. 7. 5)
言語와 노래(1984. 7. 5)
李海植<嶺大 국악과 교수ㆍ작곡>
“표가 따불(double) 됐는데…”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좌석번호가 중복되었을 때 들어볼 수 있는 말이다.
"그거 메이커(maker)가 있는 겁니까?" 백화점 등에서 제품이 유명 사(社)의 것이냔 뜻이다.
“로얄(royal) 층은 얼마입니까?” 아파트 지역의 복덕방에서 통용되는 말로써 위치ㆍ층수ㆍ방향 등이 가장 좋은 아파트를 가리키는 말이다.
“미스터 김군”은 음식점 등에서 쉽게 들어볼 수 있는 어휘들이다.
세계의 공간과 시간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는 이때 언어가 다양해지고 다변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지만 위와 같은 보기는 어딘가 우리 말의 순수한 현주소가 분명치 못한 느낌이다. 허나 그뿐인가? 방송매체나 선전 간판들의 어휘 구성은 누가 더 한글의 목을 비틀어서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단문(短文) 구사를 할 수 있는지 경쟁이나 하는 것 같다.
순수한 언어의 보존이 민족의 생명인 것을 화교들에게서 볼 수 있는데 요즘처럼 문명이 일가월변(一加月變)하는 때일수록 우리 말을 가꾸고 다듬어가야 할 것이다.
그럼 언어와 가곡(歌曲, 원래는 歌謠임)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뮐러(Wilhelm Müller, 1794~1827)의 아름다운 시가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에게 불멸의 가곡을 남기게 한 것을 보면 고금에 언어와 음악은 일치되는 것이다. 언어의 구조적 이해 없이 노래를 짓는다는 것은 창작의 순리가 되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의 가곡은 가사와 곡조가 별개인 것이 많다. 한 가지 보기로 홍난파 가곡에서 가사를 빼어버리면 모두 시양음악 그대로이며 이런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서양음악과 우리 말 가사를 접목해 보면 어순(語順)이 틀려서 구절법(句節法 articulation)에 차이가 생기며 관사나 전치사가 없기 때문에 악센트가 맞지 않아서 가사 내용을 전달하는 윤색(潤色) 묘사가 어렵게 된다. 또 우리 말 가사를 서양의 벨칸토(bel canto/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 창법으로 부르면 <그 집앞>이 <거지밥>으로, <가고 싶네>가 <가거심네>로 들린다. 그런대로 서구식 의상으로 꾸며내는 대중가요나 예술가요가 우리네 음악인양 정착되어 버린 것이 현실이다.
인류학적 측면에서 한국인의 팔자걸음과 춤에 맞는 음악은 3박이며 그래서 전통적인 행진곡도 3박자로 맞춘다. 이러한 전통음악의 일부 실체(實體)라도 노래짓기의 요소가 된다면 역동적이면서 한편 메이커(maker)의 주소도 분명해질 것이다. 언어는 종(種)의 특성을 가졌다는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의 견지에서 우리의 언어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때 낡아버린 서구적 수법을 더블(double) 하는 일이 없이 씨앗이 뿌리 내리듯 토착하는 음악이 나올 성 싶다. 음악은 로열(royal)이 아닌 모든 이의 것이므로 이 방면의 미스터 천재를 기대해 본다(1984. 7. 5. ?每日新聞? 칼럼 “每日春秋”/대구).
참고 문헌
Leonard Bernstein(朴鍾文 譯), [대답없는 질문], 서울: 主友,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