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관현악단과 관련된 몇 가지 생각들. 1996. 1.

대구시림국악단의 제58회 정기연주회가 지난 12월 18일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있었다. 상임지휘자 윤명구 교수의 지휘와 국악단의 산모 역할과 초대 상임지휘자를 맡았던 구윤국 교수의 집박은 송년음악의 밤으로 마련된 이날 연주회의 무게를 더해 주는 것이었다.
1984년에 창단된 대구시립국악단은 이번 정기연주회가 58회인 것을 보면 그 밖의 이런저런 연주회와 함께 그동안 아주 의욕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재(呈才) 멤버를 포함한 현재의 단원 59명은 1992년에 창단된 경북도립국악단과의 대조를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대구시립과 경북도립국악단은 이 지역에서 쌍벽을 이루는 우수한 국악단이기 때문이다.
삶의 사나운 파도를 잠재운다는 <만파정식지곡>(萬波停息之曲)으로 시작된 이날의 프로그램은 송년을 의식한 축제적인 상승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정재는 임금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재능(才能 talent)을 바치는 궁중의 춤이다. 그래서 춤을 추다가 임금을 치하하는 창사(唱詞)가 불러지는데 대형 무대에 올려진 정재에서는 이 치어(致語)가 관중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창사의 내용을 프로그램의 해설에 끼었더라면 관중의 이해가 한결 높아졌을 것이다.
한국음악의 특징을 흔히 악(樂)ㆍ가(歌)ㆍ무(舞) 일체라고 쉽게 들추어 말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고대 그리스 음악으로부터 이 세상에 악ㆍ가ㆍ무 일체가 아닌 음악이 어디 있는가? 동양음악에서의 악ㆍ가ㆍ무 일체란 정확하게 문묘(文廟)나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인 좁은 의미의 아악을 가리킨다. 악ㆍ가ㆍ무 일체란 현대적인의미에서는 분화가 덜 된, 다시 말하면 전문화가 미흡한 상태의 다른 표현이라고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관현악과 정재가 포함된 대구시립국악단이 서로 분리될 수 있다면 각각의 비약적인 발전과 능률적인 향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립국악단이 아닌 시립국악관현악단으로서의 확대된 면모를 갖추고 지금보다 더 비약적인 발전을 기약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가 KBS 라디오의 프로듀서였을 때 해금을 연주하던 전태영씨가 부르는 <창부타령>은 경기민요의 진짜 목구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 구성진 소리는 테이프로 기록되었다. 그러한 전태영씨의 목을 물려받은 전숙희씨가 대구의 이은자씨와 함께 창부타령 등의 경기민요를 불러서 송년의 축제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북돋워 갔다.
나는 70년대의 방송사 시절에 경북지방의 여러 곳을 답사한 적이 있는데 그 때 가장 많이 들은 민요가 <노랫가락>과 <창부타령>이다. 이로 보면 이날의 창부타령이 청중에게 많은 공감대를 얻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의 토속민요들이 학문적으로, 또는 여러 가지 민속행사와 대형 방송사의 많은 관심의 대상이지만 실제 무대의 공연에 올려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 이곳 경북지방에도 뛰어난 토속민요들이 많다. 이 지역의 국악계는 물론 연주단체들도 이곳의 토착된 음악문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문화예술이란 정치와는 달리 지역적 특색이나 개성이 강할수록 뛰어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대학이든 기성 단체이든 이곳의 진정한 국악문화가 있는지를. 나는 이런 의미에서 판소리도 경상도의 억양에 맞는 것이 나와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지가 오래다(잡가가 경서도의 판소리이듯).
다음은 국악 관현악단에 관한 평소의 나의 생각들을 간추린 것이다.
강원도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웬만한 대도시에는 국악관현악단이 설치되어 있다. 또 매년 전국의 국악관현악단이 한 데 모이는 축제도 열린다. 전통문화의 창달을 위해서 참으로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무대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듣노라면 거의 모든 국악관현악단의 성격이 공통됨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국악관현악단이 각각의 본고장에서 연주되는 프로그램을 보더라도 별다른 특색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다만 ’95 전국 국악관현악축제에서는 대구시립국악단만이 개성있는 레퍼토리를 보여주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악의 중흥기에 접어들어 있다. 하지만 국악관현악단에서 연주되는 곡목은 전체적으로 전통음악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선호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론적으로는·분명히 국악이 아닌데도 그저 우리의 정서에 맞으면 국악이라고 둔갑되어서 연주되기도 한다. 이처럼 프로그래밍에 있어서 청중의 구미에만 맞추다보면 최소한의 미학적인 검증이 소홀해지기 쉽다. 그래서 현재의 국악관현악단에서 연주되는 곡목들은 혼돈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교향악단(symphony orchestra)이 제대로 자리를 잡는 데는 보통 일백 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리고 악단의 뚜렷한 성격과 품위를 유지하는 데에 유달리 노력을 쏟는다. 그래서 교향악단은 국력이나 도시의 문화척도를 나타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서양의 교향악단과 우리나라의 국악관현악단을 비교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일지 모르지만 나는 종종 이 둘을 비견한다. 원래 sym과 phony란 함께 울린다는 교향(交響)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크게 보면 국악관현악도 이 뜻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각각의 국악관현악단이 연주하는 전통음악은 재해석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순간적인 소리의 울림은 연주행위를 통하여 그때그때마다 다시 새롭게 소생하기 때문이다.
연주는 수준있는 예술의 표현행위이다. 그러므로 초기적인 소리의 현실화와 민속적인 혼돈의 양태에 머물고 있는 프로그램의 품위도 재고되어야 한다.
국악관현악단이 거의 관립(官立)이므로 다수의 납세자를 위로한다거나 행정 편의상 청중의 증감현상을 전혀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국악연주는 거의 습관적인 무료입장이고 객석의 감상 상태는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순환이고 그다지 수준있는 음악문화라고 하기는 어렵다. 흔히 음악행위자가 청중을 찾아다닌다고 하나 이것은 수준높은 음악가에게는 맞지 않는 말이다. 이곳 대구만 해도 공연장이 모자랄 만큼 연주회가 많고 또 거의 무료(?)인 때가 흔하다. 이런 현상은 경제논리로 보아서 너무 헤픈 음악의 세일이다. 음악(상품)이 좋으면 유료라 하더라도 청중은 모인다는 것이 평소의 나의 생각이다. 이렇게 되어야만 다수의 대중이 음악의 진정한 후원자(patron)가 되는 것이다. 전국의 대학에 국악과가 개설되어 있고 또 삶의 질이 향상되는 만큼 앞으로 청중의 요구도 높아질 것이다. 이에 따라서 깊이 감동할 수 있는 국악관현악단의 연주를 기대해 본다. [대구문화](대구문화예술회관, 1996년 1월호), 18~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