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의 이해
춤
1985년 8월호,「음악과 춤」
글ㆍ사진/이해식
전원에서 긴 통학 시간에 벌어지는 또 한 가지 재미스런 놀이는 역시 풋풋한 보릿대를 꺾어서 호드기(reed pipe)를 만들어 부는 일이었으니 그 소리는 산녁에 메아리 치고 넓은 들녁으로 퍼져 나갔다. 지금 장년이 된 세대는 거의 호드기를 만들어 불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고 춤추는 보릿대 인형을 만들어서 놀아본 추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놀이는 모두 지나간 시절 우리의 순수한 정서 생활의 일면이었으며, 또 그립지만 돌아갈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농사철이면 농부들이 논두렁의 풀섶에 앉아서 풀 한 잎 따내어 입에 물고 부노라면 그것이 곧 풀피리로써 즉석에서 만드는 가장 간단한 악기가 된다. 풀잎피리는 보통 풀피리라고 하며 초금(草琴)ㆍ초적(草笛)ㆍ초설(草舌) 등의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데, 특히 초적은 [악학궤범]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인간이 피리를 불 수 있은 때부터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는 말도 있거니와 농부들이 논두렁을 거닐면서 부는 풀피리는 어찌나 구슬프고 청승맞던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이 곧 진계면이었으며 허튼가락이었고, 여기 맞추어 추던 춤이 곧 허튼춤이었던 듯 싶다.
허튼가락이란 말 그대로 아무런 구애없이 가슴 속 깊은 밑바닥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환상적인 즉흥 가락을 이름이며 보통 산조(散調)라는 명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허튼춤도 역시 허튼가락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구애없이 즉흥적으로 자유스럽게 추는 춤이다.
농부들이 심심파적(深深破寂)으로 또는 힘드는 농사 피로를 덜기 위해서 호드기나 풀잎피리를 불고 그 가락에 맞추는 춤이 비록 보릿대춤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가락이며 타고난 자연의 신명이요 몸짓이라 하겠다.
일세를 풍미(風靡)했던 맨발의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kan)은 좋은 음악이 아니면 결코 춤추지 않았다. 시인 아버지와 이혼한 피아니스트 어머니가 개인교습을 나가있는 동안 어린 던컨은 미국의 거대한 대지에서 수평선조차 보이지 않는 드넓은 대서양의 기류를 호흡하며 마음껏 노래 부르고 멋대로 춤추면서 자랐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고 했다. 미국적인 자연 속에서 자란 던컨은 미국적인 정신 속에 그리스 예술의 정기와 예술을 섭취하여 그녀 자신의 예리한 통찰력과 타고난 풍부한 감정으로 그리스 조각으로부터 동작과 리듬을 부활시켜서 현대무용의 효시를 이루었으니 그 바탕에는 대서양의 정기를 마시며 멋대로 춤춘 데에 있다. 그러고 보면 자연과 역사는 언제나 예술의 모태가 된다.
삼면이 바다이면서도 주로 농경(農耕)을 이루게 한 한국의 자연은 앞서 말한 허튼가락이나 허튼춤이 굿의 중심인 무속(shamanism)과 고유의 민속(folklore)이 되었다.
허튼 가락이나 허튼춤은 예술상의 기교 없음의 기교로 표현하는 음악이요 춤이라 하겠는데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구수한 멋” 또는 “구수한 맛”이라 하겠다. 이렇게 독특한 어휘로 표현되는 음악과 춤 속에 물보다 진한 한국인의 영혼이 흐르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산기슭 목수(牧豎)가 불어내는 풀잎피리의 구슬픈 가락이요 두렁길 농부의 구성지고 허심탄회한 춤이라 하겠다.
이사도라 던건은 아이들에게 무용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춤의 영혼이 흘러나오는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그의 자서전에 기록하고 있는데 춤의 영혼은 음악의 영혼과 통함이라고 할 수 있으니 쿠르트 삭스(Curt Sachs)의 말대로 춤은 음악의 아버지이다. 우리가 춤과 음악의 영혼을 감지할 수 있을 때, 교향곡 전곡을 춤 추어낸 던컨처럼 영산회상 전곡을 춤추어 낼 수 있는 한국의 무용가가 나오리라 기대한다.
던컨 무용의 음악적 특징은 이른바 세계주의 무용음악이다. 즉 무용을 위해서 작곡된 음악보다 쇼팽의 장송곡을 비롯한 소품들, 멘델스죤의 무언가, 베토벤의 교향곡, 바그너의 음악 등을 자기 춤의 음악으로 택했다.
흔히 음악을 무용과 자매예술이라고 한다. 리듬을 매개체로 하는 무용과 음악은 동전의 앞뒤 면과 같이 동일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위:
위: 「멀리 있는 무덤」, 서울시립무용단 제12회 정기공연
한국 명무전. 1982. 6. 23.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서울.
가운데: 「박병천의 진도북춤」, 한국무속예술보존회.
1981. 7. 21. 한국의 집/서울 필동.
아래: 「승무」, 이매방 승무 발표회. 1977. 7. 30.
YMCA 대강당/서울.
던컨은 평소 아주 튼튼한 음악적 견해와 지성으로 무장한 자기 주장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즉흥 무용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대 유럽의 젊은 학생들을 열광케 하고도 남았다. 즉흥(卽興 improvisation)이란 원래 라틴어의 준비가 없이라는 eximproviso에서 유래한 말로써 춤 안무나 음악 작곡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즉흥은 특히 민속예술의 중요한 근간이 된다.
중국 사람들은 우주의 조화는 춤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고대 서양에서 무용은 음악이나 시가(詩歌)와 함께 발라드 댄스(ballad dance)로써 하나의 유기적인 결합체였다. 동양의 아악에서도 춤이 있어야 비로소 완전한 음악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되는데 그것은 곧 악(樂 기악)이요 가(歌 성악)이며 무(舞 무용)이다.
우리는 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질 필요가 있다. 춤이라면 거의 여성적인, 혹은 여자들이나 추는 것이라고 일축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남성미 넘치는 춤이야 말로 던컨이 추구한 저 그리스의 나체 조각에서 넘치는 춤의 힘이며 얇은 의상이 밀착된 신라의 불상(佛像)이 풍겨주는 생명력과 같은 것이다.
지난 7월 18일(1985년) 대구 시민회관에서 공연된 광주시립무용단의 발레 지젤(Giselle)에서의 남성 무용수의 아름다운 율동은 가히 칭찬을 아낄 수가 없었으니 오늘날 어느 무용단이고 간에 남성 무용수 확보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춤이 필요한 이유는 생명에 대한 고조된 열정이 인간의 팔다리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며 춤을 갈망하는 까닭은 춤추는 사람은 마력을 얻게 되고 그 마력은 그에게 승리와 건강과 생명력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Curt Sachs).
피아니스트 바르톡(B. Bartók)은 그의 모든 사랑을 발칸(Balkan)반도의 민속무용에 기울여서 그의 작곡에 독특한 강점(accent)을 남겼다. 우리의 탈춤은 그 표정이나 동작이 첨단의 전자음악과도 상통함으로 본다.
춤을 이해함은 곧 바로 국악의 길과 통하며 춤을 출 수 있다면 그것은 더 높은 차원의 인생을 구가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된다. (95.3㎒ 대구 MBC-FM fan, 1985년 8월호, 14~15쪽, 「음악과 춤」).
참고 문헌
Curt Sachs(金梅子 譯), [세계무용사], 서울: 도서출판 풀빛, 1983.
Isadora Dunkan(柳子孝 譯), 이사도라 던컨의 자서전 [이사도라 이사도라], 서울: 母音社, 1978(10판). 2
Virgil Charles Aldrich(金文煥 譯), [藝術哲學], 서울: 玄岩社, 1977.
金恩淑, “音樂의 卽興性과 卽興演奏에 대한 硏究 -作曲者와 演奏者의 關係를 中心으로-,” 曉星女子大學校 硏究論文集 第30輯 別刷, 1985.
조윤재, [한국시가의 연구], 서울: 을유문화사(한국문화총서 6), 1984.
[樂學軌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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