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作文 my compositions)

작곡 후경층의 민속성(1993)

노고지리이해식 2019. 6. 13. 00:20

 

 

作曲 後景層의 民俗性(1993)

 

본문은 <예술평론>(대구:대구예술평론가협회, 1993), 제4호에 게재한 “작품 후경층의 민속성”에 첨가한 것이다. color는 內註임.

 

李 海 植(영남대 음대 교수)

 

-Ⅰ-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집단적인 습관이나 풍속을 민속(民俗, folk)이라 한다. 평지ㆍ산지ㆍ농촌ㆍ어촌, 또는 섬이나 뭍에 따라서 제각기 사람 사는 모습을 민속이라 한다. 이러한 풍속에 따르는 음악을 민속음악(民俗音樂, folk music)이라 부른다.

민(民)이란 일백 가지 성(百姓)을 가진 사람들, 그러니까 한 번에 모든 사람들을 부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석달 열흘이 바로 일백(百)이며 이것은 완전함이나 모든 것(全 all thing)을 지칭하는 숫자심리(數字心理)이다.

판소리 하는 사람이 득음(得音)을 위해서 백일독공(百日獨功)을 한다든가 손이 귀한 집에서 절에 들어가 백일정성을 드린다던가 하는 것은 일백이란 완성을 향한 인간의 간절한 소망이다.

아이를 낳은 후에는 백일잔치를 벌인다. 낳아서부터 일백일을 무사하게 채웠다는 완성에 대한 기념잔치인 셈이다. 또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되기 시작해서 약 열 달 동안과 출산 후 일백 일까지를 합치면 일년이 된다는, 사실상의 생명이 생겨나서 일 년 동안을 아무 탈없이 지냈다는(완성했다는) 축하의 잔치이기도 하다. 백일잔치의 일백은 일 년을 채우고 완성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고 세상에 태어나서 일백 일을 온전하게 성장했다는 완성의 의미가 있음이다.

백화점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온갖 물건을 집중적으로 진열해 놓은 규모가 큰 상점이다. 꼭 백 가지 물건만 있는 게 아니고 모든 물건을 완전하게 갖추어 놓은 잡화상점이란 뜻이다.

봄에 여러 가지 꽃이 피어 있는 광경을 백화(百花)가 만발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목욕탕의 뜨거운 물속에 들어앉아서, 어린이들이 그들의 놀이에서 일백까지 세는 것은 완전한 목표에 도달하는, 곧 성취함을 의미한다. 완성과 모든 것을 의미하는 일백은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민속적으로 깊이 스며들어 있다.

일백이 완성의 의미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뜻으로 백년하청(百年河淸)이란 말도 있다. 이것은 일백년을 기다려도 황하(黃河)는 맑아지지 않는다는 중국의 고사성어(古事成語)이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百聞而不如一見)는 교훈적인 속담은 일백과 관련된 동양적인 생활관이 잘 나타난 성어(成語)이다.

 

-Ⅱ-

 

속(俗)이란 사람인(人)자와 골곡(谷)을 합친(俗=人+谷) 글자로서 사람(人)이 살고 있는 골짜기(谷, valley)를 뜻 한다. 높은 뫼(山)가 있으면 낮은 골(谷)이 있기 마련이다. 낮은 골짜기에는 항상 물이 흐른다(山間水道谿). 밭이랑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걷어 들이듯이 온갖 사람들이 삶의 이랑에 면면하게 생명의 씨를 뿌려가는 현장이 곧 민속이다. 씨앗이 움트는 생명력처럼 삶의 이랑에는 항상 생동감이 넘친다.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사가 생몰(生歿)하고 변화된다. 따라서 민속음악도 수시로 변화됨이 특징이다.

한국음악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한국음악의 용어나 기호가 통일되어 있지 않고 동일 장르(genre)의 음악이라 해도 연주하는 사람이나 지역에 따라서 시김새(nuance)가 다름에 혼동과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민속이란 흐르는 물처럼 항상 생동하고 변화함이 그 특징인 이상 그에 따르는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통일되어 있지 않은 용어나 기호의 갈피를 잡고 혼동의 가닥을 정리하는 것이 곧 민속음악학(民俗音樂學, folk- musicology)에서 할 일이다.

민속음악은 자연스럽게 생성되고 변화되므로 시대양식이나 개인양식이 분명한 서양음악과는 다르다. 서양에도 우리나라처럼 그들의 독특한 민속무용과 민속음악이 전승(傳承, tradition)되고 있으며 그것들은 서양음악 발달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다름이 있다면 우리의 민속음악은 작금 우리 음악사의 중요한 자료가 될 창작음악 분야와는 거리가 너무 먼 곳에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민속음악은 자연스럽게 생긴다고 했는데 자연스럽게라는 말은 저절로 란 뜻이다. 무엇이 저절로 이루어지려면 가령 어떤 민요가 널리 불러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하여 흘러간 것이다. 이처럼 자연발생적인 민족음악은 늘 완벽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즉흥에서 즉,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의 번쩍임에서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다[Arnold Schoenberg/대학음악연구회 譯, <音樂의 樣式과 思想>(서울:삼호출판사, 1989), p. 183~4].

자연발생적인 민요와 같이 어떤 민속적 현상이 형성되는 데에 걸리는 많은 시간을 민속학(民俗學, folklore)에서는 통시성(通時性, diachronic)이라고 한다. 그래서 흔히 민속이란 흘러간 잔존의 문화라고 여길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민속이란 산곡을 흐르는 물과 같기 때문에 현재 우리의 삶도 모두 민속에 속하는 것이다.

농경을 주로 하는 옛날에는 농사에 따르는 농요나 농악이 자연스럽게 생기고 상공이 주가 되는 오늘날에는 그에 맞는 가요가 공장의 제품처럼 생산된다. 그러고는 물처럼 흘러가 버린다. 흘러간 가요란 그래서 생긴 말이 아니가 싶다. 흘러간 가요도 넓은 의미에서 민속음악의 대상일 수 있다.

현대생활에 편리한 아파트가 농경시대의 전원주택보다 바로 문 앞에 가까운 이웃을 두고 살아도 인간적인 거리는 훨씬 더 떨어져 있다. 따라서 부르는 노래도 전혀 다르다. 농경시대의 민요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call and response) 하는 협동적이고 반제적(反題的)인 형태이나 현대생활의 가요는 혼자 부른다. 노래방에 가더라도 노래는 혼자 부른다. 노래방은 급속하게 퍼져나간 현대 도회민속의 한 가지 양태이다.

 

-Ⅲ-

 

어린 시절 기다란 대나무를 다리 사이에 넣고서 여럿이 함께 발맞추어 뛰어 놀던 친구를 죽마고우(竹馬故友)라 한다. 어리지만 호흡이 잘 맞아서 신나게 노래 부르며 온 동네 고샅을 누비고 다니던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새끼줄을 묶어서 그 안에 여러 사람이 들어가 한 줄로 서서 맨 앞사람의 지휘에 따라서 기차놀이하던 모습을 나이 든 세대라면 거의 기억할 것이다. 이와 같이 줄은 여러 사람의 호흡을 일치 시키고 행동이 하나 되게 하며 자연스럽게 음악적인 리듬을 만들어 내게 한다.

새끼줄은 짧고 연약한 볏짚을 연달아 꼬아서 만든다. 솜씨도 없고 짚나라미가 거칠거칠한 새끼줄은 우리의 서민적인 생활 그대로이다. 우리의 서민적인 생활이란 보이지 않는 마음을 새끼줄로 묶은 지극히 끈끈한 연대감(連帶感)이다. 음악으로 바꾸어 보면 곧 시나위라 하겠다. 시나위는 원래 산조(散調)와 함께 무속(巫俗 shamanism)에 수반된 음악이지만 지금은 훌륭한 연주회용 음악(concert music)으로 세련되어 있다. 신명(enthusiastic)과 엑스타시(ecstasy, 脫我)가 핵심인 이들 무속음악은 투박하지만 질박한 인간성이 배어있는 줄로서 우리들 서로간의 마음과 역사를 연결해 오고 있다. 새끼줄이 음악 관련의 줄이라면 동아줄은 놀이 관련의 줄이다. 동아줄은 여러 겹의 새끼줄을 겹으로 꼬아서 굵고 튼튼하게 만든다.

   

           ▲ 광산 고싸움놀이. 줄은 마음의 전도체이며 힘의 집합체이며 리듬의 운동체이다. 1976. 10. 22. 제1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진주 공설운동장 示演. 촬영/이해식. 

 

무형문화재 제33호 <광산 고싸움놀이>는 전라남도 광산군 대촌면 칠석리 옻돌마을에서 매년 정월 초순부터 벌어진다. 고싸움놀이의 머리 부분을 이루는 고(固)는 동아줄로 만드는데 그 굵기가 아주 아름차다. 싸움놀이에 나갈 그 모양이 보기만 해도 어딘가 안심이 되고 마음이 든든해진다. 고에 잇대어진 꼬리줄은 가느다란 동아줄이다.

고싸움은 두개의 고가 서로 부딪치며 휘돌고 누르고 나아가고 물러나고 하면서 상대방의 고머리를 땅에 닿게 하면 이기는 것이다. 고와 고가 부딪치는 엄청난 힘, 스피드와 박진감은 서양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드라마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서양의 힘은 강한 강철이나 딱딱한 콘크리트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부딪치게 되면 어느 하나가 완전히 파괴되고 괴멸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고의 힘은 부드러운 짚에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서로 맞부딪치고 충돌해도 부서지지 않고 해일처럼 하늘로 솟아 올라갈 뿐이다. 그러므로 고놀이는 마치 성(性)적으로 서로 어르고 다투던 것이 화합과 일체감으로 완성된다.

고놀이는 거문고처럼 줄밀기이다. 그리고 꼬리로 갈수록 풀려 있음으로써 가야고 줄을 농현하는 것처럼 곡선으로 요동친다. 고의 뒤에서 꼬리 동아줄을 붙잡고 뒤 따르는 사람들은 맨 앞에서 고를 타고 지휘하는 사람의 작전에 따라서 응원하는 함성을 지르고 동아줄을 통하여 힘의 이동에 균형을 이루어 고싸움이 승리하도록 협동한다. 줄은 보이지 않는 마음이 전달되는 전도체이며 힘의 집합체이며 움직이는 리듬의 운동체이다.

남해안 어촌에서는 후릿그물(漁坊)을 만들기 위하여 굵은 줄을 줄틀로 꼬와서 만든다. 여기서 줄틀로 줄을 꼬아 만듦을 민속적으로 말하자면 줄틀로 줄을 짠다고(weave) 해야 할 것이다. 전라남도 남해안의 거문도에서는 그물을 만들기 위한 줄을 짤 때는 <술비소리>를 부르는데, 이 술비소리는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어느 뱃노래보다도 가장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민요이다. 어쨌든 후릿그물의 양쪽 끝 다불줄에 연결하기 위한 튼튼한 줄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한 개의 줄틀에 보통 6~7명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작업한다. 줄을 꼴 때 특히 부산의 좌수영(左水營)에서는 내왕소리를 주고받으며 바다에서 후릿그물로 고기 잡는 과정을 그대로 뭍으로 옮겨와서 북소리와 함께 본격적인 어방놀이를 벌인다. 이것이 무형문화재 제 62호로 지정된 <부산 좌수영어방놀이>이다. 나의 작품 「어방굿」[1985. 9. 16.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제4회 정기연주회 위촉작품, 지휘/이의경, 시민회관 대강당/부산.]은 부산 좌수영 어방놀이를 소재로 한 관현악과 합창이며 한국인의 기층(基層)적인 어획 생활을 현대적인 수법의 굿으로 표현한 것이다.

 

내 왕 소 리

 

1985. 9. 19. 제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강릉 종합운동장.

채록채보/이해식. ♪=94 메)/메기는 소리 받)/받는 소리

 

 

 

한국의 전통적인 민속이 다 그렇듯 어방놀이도 고기잡이의 team work을 미리 익혀보고 협동심 유발을 튼튼한 밧줄 짜기로부터 시작한다. 놀이는 한국인에게 있어서 한 차원 높은 삶의 연습이라 하겠다.

 

 

-부산 좌수영 어방놀이에서 줄을 짜며 내왕소리를 부른다. 한국인에게 노동은 놀이이며 놀이는 삶을 한 차원 높이는 연습이다. 1985. 9. 19. 제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강릉 종합운동장 示演. 촬영/이해식-

 

 

줄을 만들기 위하여 소리를 부르는 동안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로 일치되어서 생산성을 높인다. 줄은 사람의 마음을 서로 교감 시키고 순환 시키는 사회적인 매체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농경민족의 줄다리기는 농사짓기를 위한 협동을 단속하는 예행연습이다. 주로 명절에 민속적인 행사로 벌어지는 줄다리기는 동네끼리 또는 남녀끼리 대항한다. 대부분의 줄다리기는 외줄을 잡아당기는 놀이이다. 그런데 매년 정월 보름날 밤이면 전라북도 김제군 월촌면에서 벌어지는 전북 지방문화재 제7호 <입석(立石) 줄다리기>는 남성의 고(매듭)가 있는 숫줄과 여성의 고가 있는 암줄을 각각 따로 만들어서 그것을 결합시킨 후에 남녀 성(性, sex) 대결의 줄다리기를 벌인다. 농사를 짓는 땅은 곧 여신(女神)이므로 여성 쪽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전통에 따라서 (여자처럼) 머리 딴 총각이 여성 편에 낀다든가 기타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을 붙여서 여성쪽이 이기도록 한다.

밀양의 줄다리기는 또 다르다. 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에서 벌어지는 개줄다리기는 새끼줄로 만든 커다란 고리에 동아줄을 묶어서 목에 걸고 땅바닥을 기면서 잡아당기는 놀이이다. 이러한 형태는 서서 당기는 줄다리기보다 이색적일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농경놀이(김매기)에 가까움이라 본다.

 

 

 

-땅바닥을 기어가는 밀양 개줄다리기는 농경을 흉내 내는 놀이이다. 1984. 10. 16. 영남대학교 농축산대학 녹원제에서 촬영/이해식-

 

 

우리나라의 놀이에는 의례히 풍물패가 따른다. 이 풍물패는 응원 겸 흥을 돋우고 구경꾼까지도 심리적으로 한패가 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풍물은 거의 모두 여성을 상징하는 보름달처럼 둥그런 타악기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보름달과 같이 풍성한 농사를 기원하는 상징이다. 또 김제지방의 입석 줄다리기처럼 남녀의 고를 결합시킨 성(性) 대결의 줄다리기를 정월 대보름날 밤에 벌임도 풍년을 기원함과 주술적인 맥락이 통한다. 선사시대부터 이미 물-달-여성(女性)이라는 패턴은 인간과 우주 사이의 풍요(豊饒)의 순환회귀(循環回路)를 형성하는 것으로써 보여졌다[M. Eliade/李恩奉 譯, <宗敎形態論>(서울:螢雪出版社, 1985), p. 109].

줄다리기는 달맞이 놀이이다. ‘다리기’는 ‘당기기’의 뜻이지만 ‘다리기’로 굳이 쓰는 까닭은 음운 상으로 ‘달맞이’와 관련 짓고자 함일 것이다. 특히 줄다리기는 해안과 평야지대의 농어민들이 공동운명체 의식을 길러 풍요한 생산을 바라는 달 밝음의 ‘밝’사상(思想)에서 싹튼 달맞이 민속의 하나다. 풍년이란 참으로 긴 시간과 지극정성과 많은 노력의 줄다리기(달맞이)로 보상되는 순수한 창조행위이다.

줄다리기는 줄이 매체가 되는 농경사회적인 놀이이다. 공격과 반격ㆍ상승과 하강ㆍ질문과 답이라는 사회적인 놀이 속에서 운율의 언어와 음악, 무용 등의 원리를 찾을 수 있다고 호이징가(J. Huijinga)는 주장한다.(각주)

바다는 어획 줄다리기의 현장으로서 이와 관련된 나의 작품 「어방굿」을 이미 언급하였다. 들(野 또는 原)은 농경 줄다리기의 현장이며 이에 관련된 나의 작품으로는 「들굿」(野祭)[1983. 11. 5. 서울대음대 제15회 국악정기연주회 위촉작품, 지휘/이성천, 국립극장 소극장/서울]이 있다. 들은 언제나 열려있는 자연의 상태이며 여기에서 벌어지는 제의는 풍요한 생산을 위한 기능을 가진다. 놀이는 농경생산의 노동과 일치되어서 삶의 열락을 추구한다. 들굿은 이러한 제의와 놀이가 적극적으로 줄다리기되는 작품이다.

줄은 또한 금기(禁己, taboo)를 표시 한다. 출산(出産) 하면 외부의 부정을 막기 위하여 문간에 건너 질러 매는 <인줄>이 바로 그것이다. 출산이야 말로 인간의 가장 신성하고 완벽한 창조이기에 그 자신의 존재를 위하여 금줄로서 테두리를 정하여 보호하려는 것이다. 이때의 줄은 일종의 성역(聖域, hiorophant)을 표시한다.

출상(出喪)할 때 상여의 앞뒤로 연결된 긴 줄을 여러 사람이 어깨 위에 메고 감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줄은 우리나라의 승천설화(昇天說話)에서는 생명선인데 이것은 하늘(天)과 땅(地)과 이들 둘 사이에 있는 사람(人)으로서 삼극(三極)이 되기도 한다. 나의 「승천」(昇天)[1978. 10. 11, 서을대학교 음악대학 제20회 국악정기연주회 위촉작품, 지휘:한만영, 국립극장 소극장. score는 李海植, 국악관현악곡집 <海東新曲>(慶山:嶺南大學校 出版部, 1983), p. 158]은 그리스 신화와 우리나라의 승천설화를 국악기로 현대적 감각에 맞도록 부각시켜 본 작품이다.

굿에서 기원한 살煞)풀이춤은 해로운 빌미가 되는 독하고 모진 기운을 풀어가는 수건춤이다. 줄다리기가 양편으로 갈라진 여러 사람들이 지신(地神)을 즐겁게 하는 힘겨루기라면 수건춤은 춤꾼 자신의 양손으로 수건을 어르는(신을 어르는) 오신(娛神)의 놀이이다. 무용은 신의 율동을 반영하며, 그 율동은 우리를 지상에서 움직이게 한다[Geradus van der Leeuw/尹以欽 역, <종교와 예술>(서울:悅話堂, 1991), p. 15의 서문. 이 서문은 M. Eliade가 쓴 것임].

춤꾼의 두 손 사이에서 너울거리는 수건은 줄의 형태를 가지면서 줄보다도 한층 더 부드럽고 가날프다. 그 길다란 수건은 허공을 날면서 보이지 않는 살을 풀고 동시에 서로의 인간적인 유대를 줄로서 묶어 보려는 염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상징한다는 것은 곧 의미를 창조하고 부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것을 포함한다. 상징에는 외형구조와 의미의 두 가지가 복합되어 있다[L. A. White/李文雄 譯, “문화의 기초 상징,” 李康淑 編, <種族音樂과 文化>(서울:民音社, 1985), p. 16].

살풀이춤은 하느작거리는 수건을 든 한낱 여인의 연약하고 유약한 외형구조로 보일지 모른다. 또 이 외형구조의 일차적 의미는 원초적인 무속성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살풀이춤은 한국 민속무용의 역정과 총체성이 함께 세련된 무대춤으로 발전되어가고 있다. 춤은 내 모든 작품의 출발점이다.

 

-Ⅳ-

 

매듭은 노ㆍ실ㆍ끈처럼 긴 줄을 한데 잡아 맨 덩어리이다. 전라도 지방의 씻금굿 <고풀이>는 광목천으로 여러 개의 매듭(고)을 지어서 하나씩 풀어가는 거리(科場)인데 이것은 저승에 못가고 떠도는 원혼의 한을 풀어서 저승에 잘 가도록 인도해 주는 굿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듭을 짓는 데에 천부적인 소질을 지니고 있다. 앞서 얘기한 광산고싸움놀이의 고는 커다란 매듭이다. 옷고름의 고름도 고이며 고는 매듭이고 맺음이다. 매듭은 매(結)+묶음(束)의 뜻이 함께 있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매듭을 짓고 풀어감은 우리의 민속에서 굿으로 통하는 놀이이며 굿은 원초적인 춤과 리듬을 유발하는 근원이 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매듭을 짓자는 말의 매듭을 음악으로 바꾸어 보면 악절(樂節, phrasing 또는 passage)과 종지(終止, cadence)이며 미술에서는 구도(構圖, composition)이다. 사군자(四君者)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대나무(竹)는 줄기의 균형잡힌 매듭과 잎의 풀이로서 이루어진다. 대나무가 지조(志操)의 상징으로 불림은 질서정연한 매듭이 있어서이다[박용숙, ?한국의 미학사상?(서울:일월서각, 1990), p. 89]. 나머지 매(梅)ㆍ란(蘭)ㆍ국(菊)도 맺음과 풀림의 구도로 이루어진다. 사군자는 한국인의 심성이 맺음과 풀림의 균형으로 이루어진 화폭이다. 그것은 흑백(black white) 사진의 예술성이 천연색(colour)을 능가 하듯이 묵으로 그린 사군자는 어떤 색채화보다도 그 예술성은 뛰어나다.

전라북도 익산군 삼기면 오룡리 검지부락 사람들은 등에는 지게를 지고 두 손에 든 대나무 토막을 부딪쳐 내는 소리에 맞추어서 춤을 춘다. 나의 작품 「대굿」(竹祭)은 익산 사람들의 지게목발춤을 보고 대나무가 가진 매듭과 잎의 엠비벨런스(ambibalance)를 리듬으로 표현한 것이다. 연주자들이 두 손에 들고 부딪치는 대나무 소리의 리듬은 역동적이며 장고와의 대항(counter)은 분방하다.

나의 작업과정은 개성 있는 리듬은 물론이고 한국의 독특한 소리들을 찾아내어서 또 다른 작품의 개성을 창조하는 일이다. 「대굿」과 뒤에서 언급할 「향발(響발)굿[1985 .9. 27.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제27회 국악정기연주회 위촉작품, 지휘:이성천, 서울대학교 문화관 대극장]에서 향발치는 소리도 그런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대굿」[1985. 12. 13. 국립국악원 제23회 한국음악창작발표회 위촉작품, 지휘/김정길, 국립극장 대극장. score는 李海植, 국악관현악곡집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서울:수문당, 1990), p 74에 자세한 작품설명과 함께 수록됨]의 2악장에서 진행되는 대나무치기는 얼핏 클라베스(claves) 소리를 연상케 하지만 그와는 분명히 선별되고 아인자츠(Einsatz)는 기동성에 차 있다. 한국음악에서 장단은 매듭으로 된 리듬이다. 민속악의 진(긴)양조는 기(起)ㆍ 승(承)ㆍ결(結)ㆍ해(解)로 이루어진다. 치고 달고 맺고 푸는 순서이다. 이 네 가지 과정은 긴장(tention)과 이완(relaxation)의 매듭이다.

「영산회상」 상(上)영산의 상은 맨 위, 맨 처음의 뜻이며 본바탕이 된다 하여 본(本)영산, 또는 느리다 하여 긴영산(민간풍류에서는 진영산이라고도 함)이라고도 한다. 상영산은 영산회상의 모든 것이 한데 매듭지어진 고이며 이것을 유유하게 풀어가는 음악이다. 나는 산조의 진양조를 固와 苦로 본다. 마치 씻금굿의 고풀이처럼 옷고름을 풀어 가듯이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풀어 가듯이 진양의 고를 차근차근 풀어감이 곧 산조의 진맛이다. 풀어감(解, unchained)은 작곡에서 변주(變奏, variation) 한다는 말을 참으로 적절하게 표현한 한국적인 어휘이다.

내 모든 작품의 변주는 고나 매듭을 풀어가는 한국적 정서에 뿌리를 둔 것이다. 민요굿(무속)ㆍ농악 등의 민속과 관련하여 춤으로 풀어가는 나의 작품에는 항상 놀이가 있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나의 작품 속에서 놀이는 몸짓(춤)과 일체이며 이것을 바꾸어 보면 신바람이다. 나의 작품 속에는 언제나 강력한 신바람이 놀이되고 풀이된다. 이른바 춤바람이다. 나의 작품에서는 춤바람을 위한 여러 가지 지속음의 요소들이 고집스럽게 반복된다. 나의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요소들은 곧 나를 표현하는 주장이다. 여기서 고집은 신명을 타고 자유분방하게 변주되어 나간다. 18현금 독주곡 「줄풀이 제1번」[1988. 11. 30. 21줄가야고를 위한 KBS-FM 제14회 국악무대 위촉작품. 가야고/홍재동, 장고/정회석, 국립국악원 소극장/서울. 「줄풀이 제1번」은 <바람과 女子>라는 jacket tittle로 (株)서울음반(1992]에서 출반한 LP에 들어 있음]과 제2번」[1989. 11. 7. 제21회 서울음악제 위촉작품, 가야고/지애리, 장고/김선옥, 문예회관 대극장/서울]이 바로 그러한 작품들이다.

민요에서 긴 것은 맺힘(고)이요 자진 것이나 엮음은 풀림이다. 긴육자배기와 자진육자배기, 긴수심가와 엮음수심가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음악의 특징은 느림을 빠름으로 풀어가는 slow and fast이다. 한국음악의 느림에서 생기는 여백은 화폭의 여백과 같다. 이 여백은 풀림을 기다리는 충만한 여유(餘裕)이다.

한국음악은 거의 처음에는 여유가 넘치는 느린 것이 본바탕이 되어서 점점 빨라지며 서양음악처럼 느린 것이 다시 나오지 않는다. 만약에 느린 음악이 다시 나온다면 신명의 경지가 무너질 것이다. 신명의 경지란 줄다리기 할 때처럼 팽팽해진 긴장과 놀이의 심리가 융합된 상태이다. 줄다리기는 시작할 때 느슨했던 줄이 아주 (다시 이완의 상태로 느슨해지지 않고) 팽팽해진 긴장의 상태로 끝나버린다. 서양음악처럼 악장과 악장 사이에 쉼(rest)이 있거나 교체되지 않고 연속으로 연주된다(attacca). 영산회상ㆍ가곡ㆍ산조 한바탕을 시작했다 하면 보통 40분이 넘는다. 판소리 한바탕은 족히 너 댓 시간은 잡아야 한다. 만약에 음악이 다시 느려진다면 맥이 풀려서 허탈해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빠른 음악에만 흥미를 가지게 되고 또 쉽게 이해하지만 음악이나 춤의 진수(眞髓, esprit)는 느린 여백 속에 들어 있으며 동서를 막론하고 느린 음악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음악감상이라 할 수 있다. 산조의 진양조, 영산회상의 상영산, 경서도(京西道)의 산타령, 남도의 느린 육자배기, 그리고 베토벤(L.v.Beethoven) 「월광」 소나타의 느린 서주(introduction), 쇼팽(F. Chopin) 피아노 협주곡의 느린 악장들에는 인간의 온갖 영감이 녹아 있으며 재즈(Jazz)는 느린 블루스(blues)에서 흑인 특유의 오뇌(black spiritual)를 읽을 수 있다.

 

서양 사람들은 매듭을 차근차근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칼로 끊어 버린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리기아(Phrygia)의 왕 고르디우스(Gordius)가 신전에 받친 전차의 채(轅)에는 대단히 복잡한 매듭이 매여 있었다.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를 지배하도록 약속되어 있었으나 아무도 풀지 못했다. 이곳을 원정하던 알렉산더(Alexander)대왕도 이 매듭의 미궁을 풀지 못하자 마침내 칼로서 베어버린 것이다. 만약 손으로 풀었더라면 아시아까지 정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텐데….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A. Carnegie)는 신입사원을 뽑으면서 끈으로 묶은 상자를 열어보라고 하였다. 응시자들은 온갖 방법으로 끈을 풀어보려고 노력했으나 막상 카네기가 뽑은 사람은 가위로 끈을 잘라버린 응시자였다. 주위 사람들이 의아해 하자 ?바쁜 세상에 상자를 빨리 열어야지?

 

한국인은 결코 줄을 끊어버리는 일이 드물다. 끈(줄)이 헤지면 손질하거나 이어서 다시 사용한다. 줄을 만든 원자재가 서로 다른 세끼줄과 노끈이라도 이것들을 이어서 유용하는 것이 한국인의 타고난 슬기요 심성이다.

나는 여기서 땅바닥이나 지붕을 타고 뻗어가는 박넝쿨을 떠올려 본다. 나는 어렸을 적에 여러 개의 호박 줄기를 호스(hose)처럼 연결하여 물통에 넣고 물을 뽑아내거나 땅에 묻고서 물을 더 멀리 보내 보내는 놀이를 하였다.

다른 식물에 비하여 별로 매끄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담모퉁이나 버려진 땅 아무 곳에서나 특별히 돌보지 않아도 강인하게 잘 자라는 식물! 오죽하면 못생긴 얼굴을 박꽃에 비교하는 속담이 생겼을까. 이 호박 넝쿨이야 말로 한국인의 질박한 민족성이 배어있는 식물이라 하겠다. 내가 이러한 호박 넝쿨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그것이 줄기로써 지금까지 거론해 온 줄의 민속적 의미와 통하는 것이고, 또 무속의 당금애기의 에피소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금애기 설화는 우리나라의 여러 서사무가(敍事巫歌)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거리(科場)이다. 그 간단한 내용은 어느 중과 처녀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세 아들이 장성한 후에 박 넝쿨이 뻗어가는 곳으로 따라가서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는 스토리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아이를 점지(點指)해 주는 삼신(三神, 때로는 産神이라고도 한다) 할머니가 된다는 줄거리(story)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 아들과 삼신으로 상징되는 셋(三)이라는 숫자와 박(匏)과의 관계이다. 그럼 먼저 셋이 한국음악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보겠다.

 

-Ⅴ-

 

셋은 물론 앞서 얘기한 삼극(三極)과 가장 깊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음악은 거의 3박자 계통의 리듬과 박자로 이루어진다. 중국과 일본이 이웃하여 있어도 유독 우리나라만이 3박자 계통의 음악이다. 기준을 삼는 1박은 항상 셋(三)을 포함하고 있어서 마치 하나로 보이는 아람 속에 세 쪽의 밤알이 들어있음과 같으며 소리 하나 하나 한 박 한 박이 속으로 생명력을 가진 알처럼 살아있다. 그 살아있음의 여백이 여러 가지 양상의 농현이나 요성으로 표현된다. 춤에서는 완곡한 정중동(靜中動)으로 나타난다.

셋은 물과 관련하여 무속적 또는 종교적 의미에서 재생과 창조의 근원이 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물은 잠제적(潛在的) 형질(形質)의 전체를 상징하고 있다. 물은 원천(源泉)과 기원(起源, fons et origo)이며, 모든 존재의 가능성의 모태(母態)이다. 상형문자인 한자에서 이수변(二水邊)과 삼수변(三水邊)이 획으로 된 문자는 모두 물과 샘에 관계된다. 샘이란 생동한다는 뜻이며 새로운 차원을 향한 도약을 의미한다. 여기서 도약이란 물에 의하여 거듭난다는 뜻이며 나의 작품에서는 전개되고 발전하는 변주이다.

나는 한국인의 민속적 심성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접근하면서 바람(風)과 물(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KBS에 재직하던 시절 민요채집 출장으로 이미 풍수지리의 현장에 들어가 있었고 이미 그 시절 전원 사람들의 달구소리 속에서 나의 작품은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심장을 고동치게 하고 가슴 뜨거운 역동성을 샘솟게 하고 한없는 사유(思惟)로 밤새우게 하고 춤의 환상에 빠지게 하는 모든 충동의 원천이 내 안에서 쉼 없이 불고 있는 바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굿(祭)을 작품의 모태로 삼기 시작한 나는 이미 내 자신의 강한 바람(風水)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1990. 4. 30. 중앙국악관현악단 제7회 정기연주회 위촉작품, 지휘/박범훈, 호암아트홀/서울. score는 동명의 국악관현악곡집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p. 209]은 내 안에 불고 있는 바람이요 흐르는 물이 작품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이 작품은 풍수의 관심 끝에서 탈고되었지만 작품의 초점을 젊은이와 현대라는 시제(時制 tense)에 맞추었기 때문에 특히 바람이란 모티브(motive) 말고는 전통적이고 전문적인 풍수지리와는 거리가 멀다. 어쨌든 바람은 내가 존재하고 있는 힘의 원동력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자연환경인 바람(風)과 물(水)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한랭한 북풍은 북중국 일대를 공포에 싸이게 했고 비를 머금고 불어오는 남풍은 남중국의 하천을 범람시켰다. 이러한 악조건의 북풍을 막아내고 유수(流水)를 경계 짓는 일은 고대 중국 사람들의 중대한 사항이었고, 이것이 풍수지리를 발달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과, 물 흐름의 방향이 인간 생활을 크게 좌우한 것이다. 물의 흐름에는 산(山)이 있게 마련이다. 이 산이 사람 삶의 계곡이다.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이 바람(방위) 관련의 작품이라면 피아노곡 The Junction(旌善)[1992. 12. 8. 한국작곡가를 위한 제66회 KBS-FM콘서트 위촉작품, piano/김민숙, KBS-Hall/서울]은 물 관련의 춤 조곡(舞踊組曲, dance suit)이다. junction은 강물의 합류점을 뜻한다. 강원도 정선은 수려한 산과 물이 함께 있는(合流된) 곳이어서 발음도 그와 비슷한 Junction이란 제목을 붙였다. 작품에서 정선 아리랑은 구체적인 표현보다는 빈번한 전조와 불협화음의 진행 속에서 단편적인 형상화로 표현된다. 이 작품은 현대적이면서도 온건한 수법으로 작곡되었다. 작품의 단초는 풍수의 중요한 관건인 물로부터 얻었지만 역시 나의 의식 속에서 언제나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motive를 수반한다. 때로는 세차게 역류하며 때로는 살가운 산들바람처럼 속삭이기도 하고 때로는 굽이쳐 흐르는 천태만상의 물! 이러한 물의 모습이 피아노 건반위에서 바람으로 묘사된다.

「대취타」(大吹打)와 같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행진곡(march)은 모두 3박자이다. 우리가 현대적인 학교교육을 받으면서 서양식 2박자나 4박자의 행진곡에 발을 맞추어 본 훈련과 습관에 젖어서 전통적인 3박자라면 생소하겠지만 원초적으로 우리민족의 체형(體型)에 맞는 행진곡은 3박자계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팔(八)자 걸음걸이에는 3박자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이것은 인류학과도 관계된다. 지금은 거의 모든 구조물이 층계나 계단으로 되어 있어서 한국 사람의 팔자 걸음걸이가 일자로 많이 교정된 상태이다). 심지어 옛날 양반들이 거드럭거릴 때의 걸음걸이도 느린 3박자에 맞추어야 거드럭거림이 더욱 돋보였다.

셋은 고대 인류의 사고방식으로 완전함을 뜻한다. 이집트(Egypt)의 피라미드(Pyramid)는 셋과 관련된 인류 최대의 불가사의한 완전함과 신비가 담겨진 건축물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민속문화에도 셋이 완전함을 의미하는 숫자심리로 깊숙하게 스며들어 있다. 삼천리ㆍ삼천만ㆍ삼신산(三神山:금강산)ㆍ삼태기ㆍ삼발이ㆍ삼지창ㆍ삼거리ㆍ삼권분립ㆍ삼세판(三判)ㆍ삼한ㆍ삼국사기ㆍ삼국유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런가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름 석자를 대대로 유지 함은 셋과 결부된 생활 속의 가장 보편적인 보기이다.

삼국시대 음악을 기록한 ?삼국사기? 「악지」(樂志)는 맨 처음을 삼현 삼죽(三絃三竹)으로 시작한다. 삼현이란 거문고ㆍ가야고ㆍ비파의 세 가지 현악기를, 삼죽은 세 기지 관악기로 대금ㆍ중금ㆍ소금을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악기를 제작하는 칫수(値數)조차 셋(三)과 우주에 관련되어 있는데, 한 가지 보기를 들면

 

 

거문고의 길이가 3척 6촌 6분인 것은 1년 366일을 본뜬 것이고 넓이가 6촌인 것은 6합(六合:天 地 東 西 南 北)을 상징하는 것이며...위가 둥글고 아래가 모난 것은 하늘과 땅을 나타내는 것이다(琴長三尺六寸六分 象三百六十六日 廣六寸 象六合… 上圓下方 法天地也).

 

 

거문고를 만드는 칫수의 근본은 셋이며 이것은 오늘날도 지켜지고 있다. 다른 악기를 만드는 칫수의 근본도 거문고와 마찬가지로 셋에 있다.

시조의 기본인 평시조는 초장ㆍ중장ㆍ종장의 3장이며, 2개의 피리와 젓대ㆍ해금ㆍ장고ㆍ북의 삼현육각(三絃六角) 편성으로 연주하는 생동감 넘치는 무용곡인 삼현영산회상, 나비춤이라고도 부르는 불교무용인 삼귀의작법(三歸依作法), 아리랑류의 민요에 맞는 세마치(三) 장단 등, 실제 음악과 춤을 살펴보면 온통 셋의 짜임새요 그것의 연속이다.

민속악의 진양 장단은 24박이나 되는 바 리듬(bar rhythm)이다. 이처럼 긴 24박을 헤아린다는 것은 비음악적이므로 3步格 trimeter처럼 3박을 하나로 묶어서 6박씩 네 개의 작은 바 리듬으로 나눈다. 이것을 각각 앞에서 언급했던 起承結解, 또는 春夏秋冬 네 개의 각으로 구별하여 장단을 친다. 24박이나 되는 긴 여백의 진양 장단도 셋이 근본이란 걸 알면 쉽게 헤아릴 수 있다. 중모리나 중중모리의 구조도 역시 셋에 기초한다.

한국음악의 실제적이고도 구조적인 이해는 셋의 이해로부터 시작함이 순서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국악의 배경을 이루는 셋과 관련된 민속문화의 이해이다. 민속문화란 전통적인 민중 문화이다. 민속문화는 통시적(diachronic)이어서 민속주점이나 민속식당을 차리듯 결코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특히 방송에서 민속이란 포오멧(format)을 앞세워 깊이 연구되지 않은 국악 프로그램을 선 보이는 때가 종종 있다.

내가 작곡하는 모든 작품의 정서적 배경은 한국의 전통적인 민속문화이다. 내 작품은 연주하기 전에 리듬을 비롯한 작품 구조(construction)와 이에 관련된 풍물굿, 풀이와 관련된 무속음악(shaman music), 기층문화의 저변인 민요 등의 총체적인 민속문화(total folk culture)를 먼저 연구할 것을 권한다. 이러한 배경과 함께 재즈 등, 외래 민속음악의 리듬도 용해되어 있음이 나의 작품들이다.

나의 「삼(三)굿」[1981. 5. 6. 영남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음악회 연주작품, oboe/임종명, Percussion/최창호, 시민회관 대강당/대구]은 셋이란 숫자가 직접 곡목에 들어있는 작품이다. 먼저 오보(oboe)․팀파니(timpani)․징(jing)은 삼극을 상징하는 동서(東西)의 편성이며 초전(初展, prologue)․본전(本展, develope)․후전(後展, epilogue)으로 된 3악장은 굿에 관계된 세거리(三科場)이다.

「원심(遠心)과 구심(求心)」[竹軒 金璂洙先生 頌壽記念 위촉작품. 1978. 5. 30. 국립국악원 제12회 한국음악창작발표회, 지휘/김용만, 국립극장 소극장/서울. score는 竹軒 金璂洙先生 頌壽記念 創作曲集 ?大樂?(서울:國立國樂高等學校 同窓會, 1978), p. 266:李海植, 국악관현악곡집 <海東新曲> p. 129]은 소리가 큰 태평소ㆍ징ㆍ대고를 각각 무대의 좌편 준비실, 중앙 음향벽의 뒤, 우편 준비실에 삼극(또는 삼각)으로 배치하여 무대 위의 관현악과 음향 균형(sound balance)을 이루게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셋의 의미를 국악관현악법(orchestration)으로 원용한 보기이다.

셋이 음악과 가장 관계깊은 것은 음높이(音高, pitch) 측정이다. 즉 어떤 진동체의 길이에서 1/3을 버리면 완전5도 위의 높은 소리가 나는데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Greece)의 피타고라스(Phy-thagoras)에 의하여, 동양에서는 중국의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으로 현재의 음악에 이르고 있다. 동양에서는 황종(黃鍾)이라 부르는 관(黃鍾管)을 음높이의 척도로 삼았는데 그 길이를 9촌, 둘레를 9푼으로 하여 역시 셋이 소리의 근본 칫수임을 나타낸다. 그러면 서양에서는 춤과 음악이 셋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자.

 

-Ⅵ-

 

  왈츠(waltz 圓舞曲)는 유럽(Europe)에서 발생한 민속무용이다. 왈츠의 기원에 대해서는 독일 기원설과 프랑스 기원설이 대립하고 있으나 대체로 독일 기원설이 우세하다. 왜냐하면 왈츠의 전신은 오스트리아의 민속무용인 랜틀러(läntler)와 같은 계통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양의 볼룸 댄스(ballroom dance)에서 왈츠․탱고(tango)․폭스 트로트(fox trot)․퀵 스텝(quick step)․빈 왈츠(Wiener waltz)의 다섯 가지 춤을 모던(modern or standard) 종목으로 묶는다. 이 중에서 3박자 왈츠는 2박이나 4박자로 된 나머지 네 가지의 춤을 추는 기본이 된다. 이러한 현상은 얼핏 이해가 안 될지 모르나 춤 동작에 따르는 박자와 리듬은 서로 달라도 춤의 걸음걸이(step)가 공통이기 때문에 우아한 왈츠의 훈련으로부터 모든 춤의 동작을 다듬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왈츠는 느린 춤이기 때문에 3박(拍:beat)을 6개의 단위(單位:unit 또는 half beat)로 나누어서 추는 것이다. 서양의 볼룸 댄스에서도 역시 셋은 완전함을 지니는 것일까?

삼화음(三和音, triad)은 서양 기능화성법(functional harmony)의 첫 출발이다. 삼화음 중에서도 으뜸음(主音:tonic)․딸림음(屬音:dominant)․버금딸림음(下屬音:sub dominant) 위에서 이루어지는 삼화음을 특히 주요삼화음(pri -mary triad)이라 부른다. 서양 화성법의 출발도 셋이 그 근본이 되는 건지? 어쨋든 삼이라는 숫자와 얽혀있음은 분명하다.

셋은 신비로운 숫자이고 동양적 사고로 보면 서양 교향곡의 수나 곡목번호(Op.)는 더욱 깊은 관계로 얽혀 있다. 먼저 저 유명한 베토벤의 제3번 교향곡 「영웅」, 제6번 「전원」, 제9번 「합창」이 그것이다. 그의 가장 대중적인 교향곡 「운명」은 제5번이지만 다섯이라는 수자도 역시 셋과 관련되어 있다. 한자 五의 옛글자(古字)인 에서 위 첫 획(一)과 아래 마지막 획(一)은 각각 하늘과 땅을, 중간의 ×은 하늘과 땅을 교차시킨다는 뜻이다. 즉 五에는 삼극의 뜻이 담겨있다. 그 밖에 슈베르트(F. P. Schubert)와 브루크너(J. A. Bruchner)도 9개의 교향곡을 남기고 있고 드보르자크(A.Dvorak)의 교향곡 「신세계」(symphony "from the New world")도 9번이다. 쇼스타코비치(Dmitrii Dmitrievich Shostakovich 1906~1975)는 그의 9번 교향곡 법이 신고전주의라 하여 공산주의 세계에서 한 때 문제가 되었다.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의 교향곡 「비창」(symphony Pathetique)은 6번이다. 이름난 교향곡의 번호가 모두 셋과 관련되어 있음은 우연인지 아니면 무슨 징크스(jinx)인지는 모르되 그러한 작품일수록 불휴의 명곡으로 남아 있다.

둘(二)과 그 사이에 하나(一)가 끼어서 이루어진 셋(三)은 인간에게 숙명의 숫자가 되는 것인지, 인간만사의 통속적인 삼각관계가 심각할수록 긴장과 이완은 고조되고 그로 인하여 모든 예술의 근원이 깊어지니 물을 의미하는 셋(三)을 진정 재생과 창조의 원리라고 아니할 수 없다. 셋은 온갖 것(만 가지)을 낳는 근원이니까(三生萬物)![老子 道德經 42章:三生萬物]

 

-Ⅶ-

 

  다시 우리의 민속으로 돌아와서 알과 관련한 박(匏)의 순서이다. 박은 악기를 만드는 여덟 가지 재료(八音), 금(金)․석(石)․사(絲)․죽(竹)․포(匏)․토(土)․혁(革)․목(木) 중의 하나이다. 박은 곧 악기이며 판소리 흥보가에서는 박타령을 통하여 인과론의 중요한 매체가 된다. 또 신화에서는 박이 알(卵)과 동일시되어 건국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우리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박혁거세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다.

박이나 알은 신이 깃드는 곳이어서 무덤(封墳)을 알처럼 만드는 까닭이 된다. 알은 속으로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이기에 인간이 죽는 다는 것은 원래 살았던 알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이다. 알은 부활을 확인하고 촉진시켜준다. 이 부활은 또 탄생이 아니고 <회귀>(回歸)이며 <반복>(反復)인 것이다[M. Eliade/李恩奉 譯, <宗敎形態論>, p. 109].

무덤 다지는 소리를 달구(또는 달게, 덜구)소리라 하는데 무속적 견지에서 달구의 어원은 닭이며 닭은 곧 알을 상징한다[徐廷範,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서울:汎潮社, 1979), pp. 158~65].

박은 알이며 원(圓)이고 호박 넝쿨은 박을 주렁주렁 맺게 하는 생명줄(줄기)이며 풀림의 선(線)이다. 즉 맺음의 곡선과 풀림의 직선이 일점(one point)에서 생성된다. 다음에 악보로 소개하는 달구소리는 알을 의미하는 박과 관계된 가장 적절한 민요이다.

 

 

달구소리

 

1978. 5. 13. 경북 상주군 공성면 옥산2동. 소리/李永雨(男 62세)와 옥산동 사람들.

채록ㆍ채보/이해식

 

 

 

무덤(알)이나 집터를 다지는 위 달구소리는 중국의 전설적인 유토피아(utopia)인 곤륜산(崑崙山)과 연결된 풍수지리상의 명당(明堂)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곤륜산맥은 아시아(Asia)에서 가장 큰 산맥이며 파미르(Pamir)에서부터 동쪽으로 달려 티베트(Tibet), 신강의 경계선을 이루고 다시 동쪽으로 뻗어서 황하와 양자강의 근원이 된다.

우리나라의 곳곳에 분포 되어있는 달구소리는 여늬 소리(민요)와 같이 누구나 즉흥적으로 메기고 받아 부를 수 있을 만큼 쉽고 간단하다. 나는 이런 달구소리를 내 여러 작품의 소재로 삼았는데, 세악(細樂, chamber music) 「사위」[1975년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위촉작품. 1982. 10. 26. 신국악예술인회 제5회 창작국악발표회, 젓대/권철수, 세피리/이종대, 가야고/최지애, 아쟁/김선일, 장고/김상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서울. score는 李海植,<海東新曲>, p. 56]는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작품 속에는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3동 사람들이 부른 덜구소리가 중간에 변주되어 있다. 「향발(響발)굿」의 3악장에도 역시 괴시3동 사람들의 덜구소리 가락이 서로 메기고 받는 합창으로 짜여져 있다. 청중도 즉흥적으로 소리를 받을 수 있도록 작곡되었고 연주 중에 실제로 흥겨운 덜구질을 벌인다(performance). 향발굿은 나의 작품집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에 첫 곡으로 수록되어 있다.

또 다른 덜구소리를 소재로 쓴 작품은 합창과 국악기 합주를 위한 「밧삭」(外數)[1976. 12. 7.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제55회 정기연주회, 객원지휘/이성천교수 위촉작품, 曲中 독창/최종민, 서울 시민회관 별관/서울. score는 李海植, <海東新曲>, p. 73]이다. 이 작품은 연평도 상여소리와 달구소리가 변주되어서 곡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밧삭」은 KBS-radio가 아시아민속음악제전에 출품하여 전통음악을 소재로 한 창작부문에서 특별상을 받은 바 있다(Baghdad, 1979. 12. 2).

 

 

-구미 밭검들노래 중에서 달구소리. 무거운 달구가 공중에 높이 뜨는 순간이다. 1991. 10. 18. 제3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여수 종합운동장. 촬영/이해식-

 

줄다리기가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줄놀이라면 전라남도 해남군 문래면 좌수영(左水營) 일원을 중심으로 전승 되는 무형문화재 제8호 강강수월래는 아름다운 동그라미 줄놀이이다. 줄다리기가 호박넝쿨과 같은 직선의 놀이라면 강강수월래는 그 넝쿨에서 열리는 박과 같은 곡선의 놀이이며 이 두 가지 줄놀이는 한국인이라는 one point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강강수월래는 금남(禁男)의 춤이며 여성 전용의 매스 댄스(mass dance)이다. 직접 손에 손을 잡고(hand by hand) 사람의 줄(human chain 인간띠)을 잇는다. 또 팀 정신(team spirit)이 깃든 춤놀이다. 「강진 강강수월래」. 제11회 남도 문화제. 1980. 11. 12. 광주실내체육관. 촬영/이해식-

 

 

처음 아주 느린 노래와 함께 뜸 들이는 강강수월래의 발동작은 보름달처럼 둥그런 원을 그리면서 신명나는 도무(跳舞, skip dance)로 점차 빨라져서 몰아(沒我, ecstasy)의 경지에 들어가니 이른 바 자진 강강수월래에서 얌전한 부녀자들의 잠재된 무서운(?) 힘이 참으로 아름다운 춤으로 생동한다. 헝가리 짚시(Hungarian gypsy)들이 느린 랏수(lassu)로부터 점점 빨라지는 후리스카(friska)를 추는 차르다스(czardas)에서 열정을 내어 뿜지만 이것은 집시 놀이의 커플 댄스(couple dance)이다. 그러나 강강수월래는 금남(禁男)의 춤이며 서너 사람에서 수 십 명에 이르기까지 어울릴 수 있는 여성 전용의 매스 댄스(mass dance)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줄다리기처럼 직접 손에 손을 잡고(hand by hand) 사람의 줄(human chain 인간띠)을 잇는다는 점이다. 또 발생 자체가 농경(農耕)과 관련된 협동이어서 훌륭한 팀 정신(team spirit)이 깃든 멋진 춤놀이라 하겠다.

 

-Ⅷ-

 

지금까지 줄에 관한 여러 가지 민속을 내 작품과 관련하여 설명했는데 이러한 줄을 작곡으로 바꾸어 보면 긴 지속음으로써 한국적 정서의 대위법이요 한국음악이 선율적으로 발달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나는 1970년대에 초삭대엽ㆍ이삭대엽 등의 가곡 반주를 score로 옮기는 작업으로 한국음악이 지속음의 집합체임을 알았다. 한국인 특유의 솜씨로 직선적인 지속음을 곡선의 아름다움으로 꾸며 놓은 것이 한국음악이다. 앞에서 소개한 「밧삭」은 이러한 줄다리기의 민속적 의미가 내포된 지속음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첫 작품이다. 그 후의 나의 모든 작품은 지속음이 근간을 이루게 되었고 또한 내 스타일의 국악관현악법을 구사하는 기초를 이루었다. 길게 지속되는 소리는 특히 전원풍의 목가적인(pastoral pedal)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에 한국의 정서를 표현하는 좋은 방편으로 나의 작품에서는 ground 형태로 반복되는 여러 가지 지속음들이 크게 작용한다.

지속음은 한국음악의 굵은 줄기이다. 한국인은 가야고나 거문고에 줄을 매어서 심금을 울리는 가락을 타 내려오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가 줄로서 맨 처음 소리의 높이를 측정한 것이 서양음악이 과학적으로 발달하는 기틀이 되었다.

서양음악에서 지속음은 비화성음(non harmonic tone)에 속한다. 대개 으뜸음이나 딸림음이 저음(bass)쪽에서 지속되는 동안 상성부에서는 이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진행된다. 길게 지속하는 소리는 파이프 오르간(pipe organ)의 발로 누르는 건반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므로 보통 오르간 포인트(organ point) 또는 페달 포인트(pedal point)라 부른다. 지속음은 모든 성부에서 자유롭게 쓰이며 그 길이는 일정치 않으나 대개 2소절 정도로 부터 전곡에 걸쳐서 관통되는 수도 있다. 또 으뜸음이나 딸림음으로도 제한되지 않는다.

서양음악사에서 지속음이 응용된 간단한 보기로써 바르토크(Bela Viktor Janos Bartok 1881~1945)의 피아노곡집 MICROCOSMOS Vol.6 중에서 No. 146, Ostinato의 Meno vivo =144의 16째 소절부터 8소절 동안 지속되는 왼손의 화음 지속은 피아노의 배음(倍音, harmonics) 효과를 노린 것이다. 건반을 한번 친 소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멸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건반을 누르고 있으면 상성부(오른손)의 움직임에 따라서 독특한 배음이 울린다. 바르토크는 이러한 배음효과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소리의 색깔(音色, tone colour)은 배음에 따라서 정해지며 또 윤택해진다.

스트라빈스키(Igor Fedorovich Stravinsky 1882~1971)의 페달음은 이미 「페트뤼시카」(Petrouchka)에서는 거의 무시간적으로 회전하는 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써 큰 역할을 하지만 「봄의 제전」(Rite of spring)에서는 오스티나토 리듬 속에 완전히 용해되어 화성의 유일한 원리가 된다. 화성적-리듬적 오스티나토의 응집력은 처음부터 불협화적인 거칠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흐름을 쉽게 따라가게 해준다. 여러 성부 중에서 한 두 소리로 길게 보속되는 지속음은 현대에 남아있는 가장 단순한 원시음악의 한 형태이며 그것의 현대적 표현은 여러 가지 변주와 반복수법으로 나타난다. 앞에서 보기를 든 바르토크의 Ostinato가 그 중의 하나이며 단순한 지속음이 리듬형(rhythm pattern)으로 바뀌어서 저음에서 반복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ostinato란 원래 이탈리아 말로 <고집 센>의 뜻이며 종종 저음에서 고집을 부리므로 Basso ostinato(또는 ground bass)라 부르지만 저음뿐만 아니라 어느 성부에서든 자유롭게 고집을 부린다.

패턴을 이루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ground의 형태는 ground motive, ground bass, 그리고 특수한 구조로 파사갈리아(passagalia)와 샤콘느(chaconne)가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ground의 형태는 반복된다는 차원에서 크게 지속음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산조음악에도 지속음 형태를 가지는 음형(音型, figure)이 아주 많다. 성금련류(成錦鳶流) 가야고 산조[李在淑 採譜, <伽倻琴 散調>(서울:世光音樂出版社, 1987), pp. 90~92]를 보면 자진모리 후반에서 알베르티 베이스(Alberti bass) 유형으로 계속해서 흥줄과 한 옥타브(octave) 위의 징줄을 탐으로써 지속음의 멋진 효과를 내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지속음은 산조의 도처에 깔려서 그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어느 민족의 음악이든 지속음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드론(drone) 또는 부르동(bourdon, 佛)은 단조롭게 지속되는 낮은 소리를 뜻한다. 이 말은 원래 백 파이프(bag pipe 風笛)에서 저음을 지속하는 관(管)을 가리켰으나 세계의 여러 민족음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인도의 라가음악은 드론을 계속하면서 그 위에 우주의 신비와 닿는 듯한 미묘한 가락이 전개된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은 신서사이져(synthesizer)와 같은 키보드(key board)의 눈부신 발달로 모든 대중음악(popular music)에 이르기까지 지속음은 참으로 다양하고 유용하게 표현된다.

피아노나 하프는 한번 낸 소리를 해금이나 아쟁처럼 직접 손으로 건드려서 변화를 줄 수 없다. 그래서 서양악기는 트릴(trill)이나 트레몰로(tremolo)와 같은 연주법이 발달된 대신 가야고나 거문고는 줄을 직접 주무르는 즉 고도의 기량과 음악성을 요구하는 농현(弄絃, vibration)에 의하여 항상 생동하는 소리를 내는 특성으로 발달하였다. 그러기에 악기에 줄을 맬 때에는 철사가 아닌 명주실을 써서 생동하는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여유를 둔다. 이 여유란 무엇인가? 영산회상의 거문고를 느짓하게 칠 때 소리와 소리 사이를 헤아리는 거리이며 정중동(靜中動)의 춤에서 순간적으로(中) 멈추어지는(靜) 춤사위를 몸의 움직임으로(動) 느끼는 것이다. 한국음악에서의 여유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생동감이 넘치는 슬기의 공간이다.

직선으로 나가는 광선이 반사되고 굴절되고 또 반반사되고 충돌되는 레이저 쇼(laser show)의 신비감처럼 지속음은 동시 진행되는 다른 성부와의 줄다리기에서 생기는 긴장과 이완으로 대범한 음악적 효과를 거두게 한다.

줄다리기 할 때의 긴박감처럼 다양하게 농현하는 지속음의 주변에는 긴장과 이완이 배음처럼 감돌고 인생의 희(喜)ㆍ노(怒)ㆍ애(哀)ㆍ락(樂)이 끊임없이 밀고 당겨지니 음악이란 마치 소리의 줄다리기라 하겠다. 줄은 인간의 마음과 마음의 울림을 전해주는 최상의 음악이요 창조의 원천이다. 줄에 음악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할 수 있을 때 생명은 영속되고 활기에 넘칠 것이다.

지금까지 내 작품의 배경을 이루는 민속적 의미를 학문적으로 추구해 보았다. 그러나 현재 내 작품 성향은 이와는 다른 방향을 모색하는 노력을 시작한지 오래다. 그것은 변신을 위한 모티브를 찾는 고심참담(故心慘憺)의 장정이다.

 

 

-참고문헌-

 

연주회

21줄가야고를 위한 KBS-FM 제14회 국악무대. 1988. 11. 30. 국립국악원 소극장/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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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제20회 국악정기연주회, 지휘/한만영, 1978. 10. 11, 국립극장 소극장/서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제27회 국악정기연주회, 지휘/이성천, 1985 .9. 27. 서울대학교 문화관 대극장/서울.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제55회 정기연주회, 객원지휘/이성천. 1976. 12. 7. 서울 시민회관 별관/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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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서울음악제, 1989. 11. 7. 문예회관 대극장/서울.

竹軒 金璂洙先生 頌壽記念 국립국악원 제12회 한국음악창작발표회, 1978. 5. 30. 국립극장 소극장/서울.

한국작곡가를 위한 제66회 KBS-FM콘서트, 1992. 12. 8. KBS-Hall/서울.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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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 [道德經].

박용숙, [한국의 미학사상], 서울:일월서각, 1990.

徐廷範,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 서울:汎潮社, 1979.

李在淑 採譜, [伽倻琴 散調], 서울:世光音樂出版社,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