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ㆍ특강

라틴 아메리카의 바람들. 2001년 9ㆍ12월

노고지리이해식 2007. 10. 17. 21:26

 

 

 

李海植(영남대 교수)

 

 

 

본문은 [韓國音樂硏究] 第34輯(서울: 韓國國樂學會, 2003)과 이해식 논문집 [산조의 미학적 구조론](경산: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6)에 게재된 “외래의 춤음악과 한국음악의 접근론”의 집필 초(草)이다. 이 집필초로 2000년 10월 15일 한국댄스스포츠연맹(KDFS) 지도자 연수회에서 특강하고, 댄스 동아리 [PARA CLUB] 신문 [PARA CLUB] 제43호ㆍ제44호(2001. 9)ㆍ제45호(2001. 12)에 3회 연재하였다. 원문에는 문헌 각주가 있으나 블러그에서는 각주 표시가 지원되지 않고 또한 독자들의 가독성(可讀性)을 떨어뜨리는 불편함이 있어서 본문에서는 각주 대신 끝에 참고 문헌을 제시하였다.

 

 

 

 

1. 불러오기

 

    흔히 춤과 음악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일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댄스스포츠에서 음악을 설명할 때는 그 방법이나 용어의 의미가 음악과는 약간 다른 데가 있다. 예를 들자면 음악에서는 박(拍, beat)을 분할(division)할 때 강박(强拍 또는 下拍, down beat)과 약박(弱拍 또는 上拍, up beat 또는 off beat)이라고 하지만 댄스스포츠에서는 이 모두를 단지 half beat(半拍)라고만 한다. 음악에서 syncopation은 인위적으로 강약의 위치를 바꾼다는 뜻이지만 댄스스포츠에서는 스텝의 지연과 분할하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또한 문자 그대로 한 발이 본래의 position에서 다른 발을 쫓아간다의 는 뜻의 발레 용어인 샷세(chass?)는 음악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스텝분할(syncopated chass?)이어서 음악이론의 분할과는 그 쓰임새가 다르다.

    본문은 춤과 관련된 기본적인 음악이론을 이해함으로써 댄스스포츠를 효율적으로 연수하고, 나아가 댄스스포츠의 문화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배경을 확대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춤의 인생을 보다 역동적으로 유도하고 행복 추구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글은 또 세계의 모든 춤과 음악이 민족이나 지역에 따라서 각기 특징을 달리해도 오랜 인류사에 걸쳐서 직?간접적으로 교류되어 왔고, 인간의 몸(身體)이 춤과 음악의 수단이요 매체요 공통분모인 데서 한국음악과의 관련성을 추구해 보려는 데에도 목적을 둔 것이다. 그리하여 외래의 댄스스포츠를 중심으로 하는 춤음악과 한국음악과의 상당한 부분에 접근 가능성이 있음을 추려가던 논문 초(草)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춤과 음악에 관련된 부분만 따로 떼어서 지난 2000년 10월 15에 있은 한국댄스스포츠연맹(KDSF)의 지도위원 연수 교재로 꾸민 것이다. 본문은 이 연수교재를 재정리한 것이다.

    본문의 제목인 “라틴아메리카의 바람들(winds)”은 “라틴아메리카의 춤바람”이란 뜻이다. ‘바람’에 여러 가지 접두사를 붙여서 사용하는 우리의 어휘 중에서도 특히 신바람과 춤바람은 불가분의 관계로써 우리의 삶을 지극히 생동케 함에도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수용하는 데는 지우기 어려운 차이가 있어 왔다. 이제 이 글이 그러한 차이를 지우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해식ㆍ성영자의 tango. PARA CLUB / The 13th Regular Meeting.

1999. 3. 28. Hotel Hyatt Grand Ballroom/Seoul.

 

 

2. 내 짝 블루스 성(成)

 

    ‘내 짝(my partner) 블루스 성(成)’은 나의 아내를 말한다. 그가 블루스(blues)를 좋아하고 잘 추어서 내가 붙인 별명이다.

    일반적으로 블루스는 탱고의 피겨(figure, 蹈型)를 많이 쓰지만 나는 가능한 춤의 모든 피겨를 끌어다가 이른바 혼합된 블루스(mixed blues)를 춘다. 그리고 리듬을 벗어날 수 있는(out of rhythm) 피겨는 빠르게 추어가다가 리듬을 맞출 수 있는 지점에서 역동적인 스타카토(staccato)로 급히 정지한다. 이것은 다분히 Ad lib. dance라 하겠다(Ad lib.는 이탈리아 말 Ad libitum의 준말로써 ‘즉흥적으로’라는 음악용어임). 이처럼 고정된 경계선이 없는 혼성춤(mixed dance)을 내 짝 블루스 성은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춤”이라 하여 매우 싫어하였다. 그러다가 혼합된 피겨를 이해하고 음악을 잘 타게 되니까 이젠 어느 춤 못지 않게 블루스를 즐긴다.

    혼성춤은 주로 여성적인 농경문화와 후기의 농민문화, 귀족문화에서 고등문화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에 걸쳐서 발견된다. 댄스스포츠는 물론 어느 춤이든 문화의 모든 계층에 혼성의 요소가 들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문화란 원래 잡종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내가 추는 블루스는 내 멋대로의 혼성춤이다. 현대의 디스코처럼 즉흥과 혼성의 절정에 이르는 나의 블루스는 곧 무의식적인 정화작용(catharsis)에 이르는 신바람과 춤바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블루스 음악은 아주 느리기 때문에 웬만한 여러 피겨들을 다 수용할 수 있다. 아마 한국의 민속 춤사위까지도 블루스에 넣어 볼 수 있다는 생각은 어떤 춤이든지 신체가 가장 중요한 춤의 매체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나라 사람들은 Viennese waltz를 3박자 한국 춤사위를지르박 피겨(figure)에 맞추어서 춘다. 이른바 한국화된(Koreanized) 혼성 지르박이다. 이것은 동양의 중국?한국?일본 중에서 유달리 한국 사람들의 음악과 춤만 3박자계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사람들이 팔자(八字) 걸음을 걷는 형질인류학(形質人類學, physical anthropology)과의 관련으로서, 전통적인 행진곡이나 거만스럽게 거드럭거리는 자태 등이 모두 3박자에 맞는 팔자 걸음이기 때문이다.

    지르박이란는 명칭은 미국 사람들이 보통 t를 r로 발음하는 ‘지러벅(jitterbug)’에서 연유한다. 이제 외래의 지르박과 블루스는 완전히 한국적인 토리(idiom)로 자리잡은 춤과 음악이 되었다. 이른바 춤의 문화변동이라 하겠다. 이로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춤과 음악을 한국화 하는 데에 천재성이 있는 것은 비단 오늘날뿐만이 아니다.

    현재 우리 나라의 전통음악과 춤 중에는 일 천여 년 이전부터 중국이나 서역(西域, silk road)으로부터 들어와서 완전히 한국화 된 것들이 많다. 이중에는 공자를 위한 제례음악(雅樂)이 중국 본토에서는 멸실된지 이미 오래여서 오히려 중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다시 배워간 적도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언젠가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한국식 블루스나 지르박을 다시 배워갈 수도 있음을 상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런 사교춤에 관심을 가져야 할 까닭은 이미 방방곡곡 널리 퍼진 한국의 토속춤이 되어서 그렇다. 이제 한국의 국민춤이 되다시피 한 블루스와 지르박은 저자거리의 흔한 댄스교본이나 비디오 테이프의 교습 수준에서 더 나아가 춤의 현장에서 사용하는 용어와(춤의 용어는 춤의 의미를 확대한다) 학문적인 이론을 정립하는 등, 이 방면의 전문가들은 춤의 정신적인 가치관도 심도 있게 재고해 봄은 물론 그에 맞는 덕목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춤의 정신적인 가치관이란 기본적인 예절(etiquette)과 겸양과 함께 직접적으로 좋은 음악과 관련되는 예능정서이다. 예절, 즉 에티켓이란 프랑스말로 들어온다는 뜻이니, 춤과 음악을 통하여 심신을 가다듬는 일은 동서가 공통이라고 하겠다.

    좋은 음악이란 격조 있는(classical) 음악이라 하겠다. 격조 있는 음악이란 언제 들어도 진부하지 않고 품위를 유지하는 음악이라 하겠다. 공자는 제(齊)나라에서 좋은 음악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석 달 동안이나 고기 맛이 생각나지 않았다고 한다(子―在齊聞韶 三月 不知肉味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좋은 음악, 격조 있는 음악에서 아름다운 춤이 추어짐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좋은 음악과 좋은 춤의 감동은 행복의 질을 한층 더 높여주기 때문이다.

 

 

3. 블루스(blues)

 

    블루스는 학대받은 미국 흑인의 비참한 생활 환경, 인간적인 고뇌, 운명관, 절망적인 심경, 실연, 실의 등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음악이다. 블루스가 처음 악보화 되기는 1890년대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이전에 이미 미국 남부의 흑인 사이에서 불려지던 필드 할러(field holler)?워크 송(work song)?스피리추얼(spiritual) 등이 블루스의 근원이라고 한다.

    블루스를 blus로 표기하는 것을 이따금 본다. 블루스는 blue(푸른, 우울한, 창백한, 엄격한, 음란한)의 복수형인 blues이지만 때로는 단수로도 취급한다. 우리 나라의 아악과 같이 기악(樂)?노래(歌)?춤(舞)을 포함하는 블루스는 재즈(jazz) 창조의 근원이며, 재즈 표현상의 정신적인 근원이 되고 있다.

    블루스의 기본적인 선율은 한 행이 4소절씩 12소절(4소절×3행)로 이루어지는데 노래할 때는 한 행 4소절을 반 정도만 부르고 나머지는 반주로 채운다. 이렇게 반주로 채워지는 부분을 브레이크(break)라 한다. 블루스에서 반주, 호응 형식의 응답 파트와 같은 테크닉은 보통 ‘break’라든가 ‘fill in’이라 불리고 있고, 멜로디의 프레이즈와 프레이즈 사이에서 가수 자신, 혹은 파트너에 의해 연주된다. 브레이크는 춤에서도 아주 중요하며 뒤에서 설명된다.

    무용은 보다 높은 정도에 있어서 음악과 떨어질 수 없는 쌍생아다. 그러면서도 춤은 음악의 아버지이며 모든 예술의 어머니이다. 음악과 시는 시간 속에 존재하고 회화와 조각은 공간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춤은 시간과 공간 속에 동시에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춤이 음악의 아버지보다 모든 예술의 근원이 되는 어머니로서의 범위가 더 넓고 그 차원도 다르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진정한 음악을 알기 위해서는 그 어머니인 춤을 추는 게 지름길이요 아름다운 춤을 추기 위해서는 음악의 이해가 전제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여기서 잠시 춤이 모든 예술의 어머니, 즉 근원적으로 여자(女子)에 대하여 춤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참고로 金容沃, [여자란 무엇인가] 117~120쪽에 있는 [說文解字]와 고대의 종교적인 생산숭배(fertility cult)와 관련된 인간중심적인(anthropocentric) 여론(女論)은 좋은 참고가 된다.

    할렘(harlem)은 뉴욕 맨하탄섬의 동북부에 있는 흑인 거주 지역이다. 하렘과 할렘은 구별되는데 하렘(Harem)이란 아라비아어의 Haram(신성불가침한 장소)에서 전화(轉化)된 말로서, 남편 이외의 남자는 들어갈 수가 없는 이슬람 사회의 부인의 전용의 방을 말한다. 뉴욕의 할렘가에서 본격적으로 발달한 블루스는 춤과 관련하여 별다른 부담 없이 추는 사교 목적의 rhythm dance 또는 rhythm and blues라고 부른다. 보통 R&B로 쓰는 rhythm and blues라는 말은 의미상 인종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리듬 앤 블루스’라는 용어는 광범위한 음악 장르를 포괄한다. 리듬 앤 블루스에는 블루스를 포함하여 다수의 가스펠 레코드가 포함된다. 또 리듬 앤 블루스를 정의하기 어려운 것은 블루스가 리듬 앤 블루스의 음악적 내용을 포괄하고 있으며 록앤롤과 연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로큰롤은 대중적인 매력을 지닌 장르로서 팝과 문화 전반에 영향을 주게 되어 블루스의 영역에서 분리되었으며, 이런 현상은 때때로 모호하고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로큰롤은 기본적으로는 블루스를 백인이 변형시킨 것이다. 그것은 백인의 컨트리 스타일과 흑인의 ‘점프’ 블루스가 융합함으로써 생겼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사교춤은 다른 어느 춤보다도 복잡한 절차 없이 직접적인 보디 터치(body touch)라는 가장 강력하고 기본적인 컴뮤니케이션의 상황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교댄스가 갖는 사회적 의의는 단숨에 보디 터치(body touch)의 친밀 단계로 상승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경우에는 허용되지 않는 당돌하고 극적인 보디 터치가 사회의 질서에 위배되지 않는 행동으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댄스는 인간이 포옹의 행위에 대해 쓸데없는 가치 부여를 하지 않고, 흉잡힐 염려 없이 일정한 선까지 포옹의 쾌감에 잠길 수 있는 문호를 마련해 준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흑인들이 자유를 갈망하는 블루스의 원초적인 컴뮤니케이션을 형이하적인(physical) 춤으로만 그릇되게 이해하려 든다. 어떤 대상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어느덧 자신의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 자칫 위선에 빠질 수 있게 한다.

    세계 도처에서 추어지고 있는, 특히 국내의 영상 매체나 업소의 블루스춤은 다른 모든 춤도 그런 것이려니 하는 퇴락적인 장면만 보여 준다. 여러 회사의 성희롱 방지에 관한 조례에 여성에게 강제로 블루스춤을 강요하지 말라는 조항이 들어 있다. 이것은 사교춤으로써 이미 우리 나라의 국민춤?토속춤이 되어버린 블루스의 현주소와 그 역기능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다. 영국의 세계적인 라틴 댄스 챔피언인 Donnie Burns는 그의 라틴 아메리칸 댄스 강의(congress)에서 대체로 아시아계의 사람들은 음악과 관려된 춤의 기본적인 훈련보다는 피겨의 학습에만 열중한다고 여러 번 지적했다. 그는 춤을 가르치기 전에 음악의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이해된 음악을 춤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2000. 6. 12~13. 서울: 강남무도학원) 우리 나라에서 춤이 이렇게 된 데는 춤이 실생활과 관련된 유흥적인 측면만 강조될 뿐 춤과 관련된 인문(人文)이나 학예(學藝)를 도외시한 탓도 없지 않다.

    선진국에선 댄스스포츠가 학문의 대상이 된 지 이미 오래된 터에 비록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국내에서도 교육의 제도권 안에 수용되는, 이른바 댄스 스포츠가 세계화되고 우리의 보편적인 생활과 더 밀접해지는 시점에 와 있다. 이런 시기에 댄스 스포츠를 희화적(戱畵的)으로만 방영하려는 TV 프로그래머들의 구태의연한 제작태도도 바뀌어져야 한다. 또 TV에 출연하는 댄서라면 사전에 방송기획(que sheet) 등의 작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방송진행의 전후에 관계된 자신의 출연 위치와 역할을 확인해야 한다. 왜냐 하면 방송 프로그램의 포맷(format)에 따라서 춤이 시청자에게 인식되는 시각이 아주 달라지기 때문에 TV 출연은 가려서 할 일이다.

   춤은 사랑의 세계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원천적으로 자유를 희구하는 흑인들의 블루스를 오해된 사랑으로 춘다면 그것은 한낱 부질없는 방사(放肆)에 불과할 뿐이다.

 

가야의 우륵은 신라 진흥왕(540~575) 때 신라에 귀화하였는데 그의 음악을 제자들이 개작하여 왕 앞에서 연주하였더니 왕이 듣고서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간신(諫臣)이 “이 악곡들은 멸망한 가야국의 음악이니 취할 것이 못된다.”고 하자 왕은 “가야국은 왕이 음란해서 망한 것이지 어찌 음악이 죄인가? 대체로 성인이 작곡하는 것은 인정에 연유하되 스스로 조절하는 데 있거늘, 나라의 잘 다스리고 어지러움은 음악과 관계가 없다.”고 하면서 우륵의 가야고 음악을 널리 시행하여 후에 대악(大樂)이 되었다(其奏之王前. 王聞之大悅 諫臣獻議 伽倻亡國之音 不足取也 王曰 伽倻王淫亂自滅 樂何罪乎 蓋聖人制樂 緣人情以爲?節 國之理亂不由音調 遂行之以爲大樂).

 

    좋은 음악과 좋은 춤이 되는 건 인간이 마음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좌우된다. 블루스는 추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세련되고 멋지게 출 수 있는 춤이다.

춤과 음악의 참 멋은 느림(slow)에서 나온다. 블루스의 매력은 그 느림에 있다. 사람들이 으레히 그렇듯 느림은 흐느적거림이 아니다. 느린 춤에서 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음은 그 세부적인(detail) 움직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느린 춤과 음악은 자기 영혼에 대한 숭고한 제의(祭儀, rite)이다. 느린 블루스는 흑인의 지순한 영혼의 소리이면서 자유를 추구하는 진솔한 몸짓인 가운데 삶의 힘이 샘솟는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블루스는 마음 정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역동적으로 아름답게, 또 재미있는 혼성춤으로 출 수 있는 대상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흑인과 관련된 춤은 아프리카에서 라틴 아메리카(중앙 아메리카)를 거쳐서 북아메리카로 추이(推移)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 유럽문화와 백인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교류하는 가운데 춤의 여러 가지 변형(variation)이 발생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라틴 아메리칸 댄스라 부르는 이른바 룸바?차차차?삼바?자이브이다. 이 춤들은 완전히 continental style로 세련된 나머지 원래의 순수한 흑인춤 또는 라틴춤과는 조금 다르게 되었지만 지금도 아프리카춤의 흔적은 아래와 같이 도처에 남아 있다.

 

 

       1. 맨발과 평평한 발(bare-feet and flat-feet)로 땅을 밟는 춤임. 이것은 후에 jig 또는 clog(구두로 평평하게 바닥을 밟는 춤)의 원형이 됨.

       2. 구부리는 자세, 즉 무릎을 굽히는 자세는 사냥에서 사냥의 대상으로부터 몸을 숨기 는 본능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임. 이것은 유럽춤의 직립 자세와는 대조적임.

       3. 동물의 움직임을 많이 모방.

       4. 측흥춤이 많음.

       5. 히프 중심의 춤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함.

       6. 주로 리듬에 맞추는 춤이지 멜로디에 따라서 동작을 만드는 일은 거의 없음[油井正一, [재즈의 역사](서울: 삼호출판사, 1987), p. 324쪽].

 

 

    춤의 진정한 재미와 즐거움은 음악의 리듬과 몸의 동작이 일치될 때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춤 추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고도의 정화감 같은 것이다. 내가 재학 시절의 합주 시간에 “리듬을 타라”는 지휘자의 지시를 이해하기 전에 학생들은 엉뚱한 연상으로 킬킬거리고 웃었지만 음악과 춤의 앙상블(ensemble)은 기본적으로 정확하게 리듬을 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어로 “흐름”이란 뜻인 ‘리듬(rhythm)’은 시간 속에서의 음악의 통제된 운동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말이다. 리듬은 인간의 마음에 선천적으로 부여된 질서에 대한 요구로부터 발생한다. 시계의 똑딱 소리와 기차바퀴의 덜거덕 소리에 우리는 자동적으로 어떤 리듬형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소리를 강박과 약박의 규칙적인 맥박으로 듣는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자신들의 시간에 대한 인식을 리듬에 의해 조직화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시(문학)?음악?무용을 삼위일체로 본 것은 이 세 분야의 골격이 리듬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도 춤은 리듬을 타는 운동이다. 한편 리듬에 대하여 철학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알아보자.

 

         리듬은 율동(律動)이라고도 한다. 심리학적 의미로는 한 계열의 자극이 적당한 시간적 또는 공간 적 간격을 두고 주어졌을 때, 그것은 객관적 또는 주관적 액센트를 갖는 하나의 <무리>로서 지각한다. 차례 차례로 이와 같은 과정이 진행할 때 각 무리는 하나의 전체로서, 그리고 그 전 과정은 각각 전체의 반복(反復)으로서 경험되는 사실을 율동이라 한다. 이와 같은 율동은 보통 음악이나 시를 낭독할 때와 같은 청각적(聽覺的) 율동, 반전도형(反轉圖形)에서 보는 시각적(視覺的) 율동 등의 지각적 방면의 것 외에 아동의 언어발달에 있어서의 율동적 반전, 동물 활동량의 율동성, 율적 동작(律的動作)이다. 뇌파(腦波)에 있어서의 알파 리듬(alpha rhythm)과 같은 운동적 방면의 것도 있다. 이와 같은 주기성(週期性)을 갖는 율동을 율동적 군화(群花)로서 경험하는 사실의 이유를 주의파(紬衣波)나 근수축파(筋收縮波) 등으로 설명하려는 많은 이론이 제출되고 있다[哲學大事典(서울: 學園社, 1963), 277쪽].

 

    리듬은 위에서 율동이라 하여 법칙 관련으로 설명되었지만 장단(長短)으로 번역되는 게 보다 실제적이다. 음악에서 장(長)과 단(短)은 digital 이론의 기본 원리인 0과 1이라고 할 수 있겠다. 0과 1의 무한한 배치 방법으로 컴퓨터를 운용하듯 음악에서는 장?단의 배치 순서에 따라서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리듬의 양상이 달라진다.

 

 

4. 라틴 아메리카의 춤과 음악

 

    라틴(Latin)은 라틴어(語)와 관계 있다.

    라틴어의 근원인 라티움(Latium) 지방은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 아페닌(Apenino) 산맥과 티레이안(Tyrhenian)해(海)와의 사이, 테베레(Tiberis)강(江)의 남서 지방을 가리킨다. 이곳은 BC 1000년경에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한 인도-유럽어족(語族) 중의 이탈리아 사람, 일파 사람, 라틴 사람이 정주한 지역으로 고대 로마의 발상지이다.

    원래 라티움의 라틴어는 인도 유럽 어족 이탈릭 어파의 한 가지이다. BC 75년경부터 로마제국의 고전 라틴어가 성립되고, AD 175년경부터는 후기 라틴어가 성립되어 본국은 물론 널리 유럽 각국과 아프리카 서부 일대의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4세기 이후로는 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의 말로 분파되고, 현대에 와서는 고전 라틴어가 천주교의 공용어 및 학술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라틴 민족은 아리안(aryan) 인종 중에서 남부 유럽에 분포한 민족을 가리킨다. 이들은 오랫동안 로마의 문화에 젖어 라틴에서 변천된 언어를 사용하며, 종교는 주로 구교를 믿는 점에서 슬라브(slave)?튜튼(teuton)의 양 민족과 구별된다. 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프랑스 등 여러 나라의 주민이 이에 속한다.

라틴 아메리카는 남북 아메리카 대륙 중에서 과거에 라틴 민족의(특히 스페인) 지배를 받아 라틴적인 전통을 지니는 지역을 총칭하며 중남미(中南美)라고도 한다. 이것은 앵글로 아메리카(Anglo America)에 대비한 호칭으로, 그 범위는 북아메리카의 멕시코에서 남아메리카의 칠레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지역과 카리브(Carib) 해상의 서인도 제도를 포함한다.

 

 

     가. 룸바(rumba)

    rumba는 rhumba라고도 쓴다. 4박자인 룸바와 차차 음악의 악센트(강박)는 1?3박인데 춤의 악센트는 2?4박에 있다. 이것이 초보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런 혼란은 행진(march)이나 제식훈련 때 강박에 왼발을 맞추던 습관이 그대로 댄스스포츠에 전이된 데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강박에 발을 맞추는 것은 ‘얼시구 절시구’ 하는 한국식 차차차이다. 우선 초보자는 <궁짝궁짝>의 4박자 음악을 <짝 궁짝 궁>으로 맞출 수만 있으면 댄스스포츠 입문의 첫 관건은 해결된 셈이다.

    룸바와 차차를 시작할 때 강하게 들리는 ‘궁’을 셋째 박(three)으로 잡고 파트너에게 신호(sign)를 보내면서 약박인 넷째 박(four) ‘짝’에서 시작한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약하게 들리는 ‘짝’(four)에서 파트너에게 신호를 보내고 ‘궁’(one)에서 시작한다. 음악연주나 춤에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보통 한 박 전에 신호를 보내는데 이것을 예비(ready) 박이라고 한다. 이 예비신호가 약박인가 강박인가에 따라서 시작의 뉴앙스가 달라진다. 시작의 어느 쪽을 택하든 예비신호는 리더의 왼발에서 보내고 오른발로 시작한다. 룸바와 차차는 항상 음악의 첫 박에서 힐(heel)에 체중을 완전히 일치시켜야 한다.

    그러면 왜 약박에다 체중을 맞출까? 서양의 음악과 춤이 약박에서 시작되는 이유는 언어와 관계된다. 즉 서양 언어의 관사나 전치사는 일반 회화에서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약하게 발음되며 노래에서는 약하게 들리는 약박에 배치되고, 명사?형용사?부사 등은 잘 들리는 강박에 배치된다. 이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생명의 근원인 호흡 관련이다. 원초적으로 사람(삶)의 호흡은 약박인 들숨으로부터 생명이 유지된다. 사람의 걸음걸이도 발을 드는 것으로부터(약박) 시작하여 강하게 딛는다. 약박은 상박(上拍)인데 이것은 이미 박을 친 후이거나 치기 전이기 때문에 off beat라고 한다.

    문학에서는 고전시의 약음부를 arsis라고 하며, 이의 반대인 theses는 현대시에서 강성부와 음악의 하박(下拍, 强拍)을 의미한다. 또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계통의 춤 동작이 음악의 약박과 일치되는 것은, 그들이 형질인류학적으로 골반(hip)이 발달되고 현저하게 위로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체형의 hip hop은 off beat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춤은 보통 걸음걸이의 심층구조이다. 신코페이션(syncopation)은 그것의 더욱 심화된 몸짓이며 음악과 춤에, 특히 라틴춤에 생생한 자극을 주는 가장 역동적인 요소이다. 신코페이션과 아나크루시스(anacrusis)를 사용하면 곡에 전진적인 움직임과 박력을 줄 수 있다 [Edward Lee, [재즈 입문](서울: 삼호출판사, 1989), 43쪽].

 

    라틴춤의 특징은 신코페이션에 있다. 신코페이션은 every→ev'ry와 같이 어중음(語中音)을 생략하거나 음절의 절분을 말하는데 그 어원은 "함께 묶는다“는 뜻인 그리스어 syn-kopein이다. 이것을 음악에서는 인위적으로 강박과 약박의 위치가 바뀌는 당김음(切分音)이라고 하며 춤에서는 분할(division)의 의미인 때가 많다. 즉 왈츠와 같은 3박은 6박으로, 4박자계의 춤은 8박으로 분할하여 추는 것이다. 보통 4분음표(♩)가 한 박(one beat)일 때를 slow, 반박(half beat)씩 두 번일 때(♪♪)는 quick quik, 하나의 quick(♪)이 둘로 분할될 때는 quick and(♬) 이라고 구호를 붙이는데 이 quick and를 춤에서는 보통 and time이라고 하는데 삼바나 자이브에서는 줄여서 이라고 부른다. 음악으로는 약박이지만 춤동작으로는 강박이다. 특히 라틴춤에서는 이 a'time에서 회전, 전후진 등의 모든 액션이 역동적으로(dynamically) 이루어지고 tension이 교차된다. 진정한 춤바람이란 이 역동성과 텐션을 이해하고 체득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빈 왈츠는 한 소절당 3박자지만 빠르게 연주되므로 한 소절을 한 박으로 친다. 이런 연주법을 일보격(一步格, monometer)이라 하며, 이와 같이 세 박을 크게 한 박으로 치는 연주를 한국음악에서는 3분박 1박이라 할 수 있겠다. 템포가 빠른 비엔나 왈츠를 한 소절마다 세 스텝씩 계속하면 쉽게 지친다. 이때 아래와 같이 한 소절을 한 스텝씩 추면서 체력을 길게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은 음악의 신코페이션이 아니라 음악이 빠름으로써 왈츠보다 춤의 굴신(屈身) 동작이 단순화된 비엔나 왈츠의 신코페이션이라고 하겠다. 신코페이션은 음악에서보다는 댄서의 춤사위에서 더 자주 구사된다. 신코페이션은 춤을 한층 더 화려하게 장식하며 눈길을 끄는 몸짓이다.

 

                                             

                                       

 

    춤과 관련하여 <바 리듬>(bar rhythm)과 <브레이크>(break)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다. 바 리듬이란 규칙적인 박자와 리듬이 주로 저음(bass)과 타악기로 반복되는 현상을 말한다. 대부분의 민속음악과 대중음악이 춤과 관련된 바 리듬이다. 이 바 리듬이 잠시 생략되고 멜로디만 연주되는 부분을 브레이크라 한다(앞의 블루스항 참조). 춤 출 때는 다음 바 리듬이 나올 때까지 이 브레이크 부분을 정확하게 맞추어야 한다.

    바 리듬과 비견되는 <프레이즈 리듬>(phrase rhythm)은 소절?박자 등을 초월하여 음악의 흐름에 따라서 규칙 또는 불규칙적인 리듬 구절을 이루어 간다. 대부분의 고전음악(classic music) 음악이 여기에 속한다. 바 리듬이나 프레이즈 리듬은 멜로디와 화성적으로 얽혀 있다.

    여기서 음악과 춤의 빠르기(tempo)와 관련된 기준 단위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 하면 음악의 빠르기는 가장 먼저 인간의 청각을 자극하고 댄서의 컨디션(condition)을 좌우하고 감상자의 시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악은 악보의 첫 머리에 M.M.♩=87, 또는♩=87 등으로 빠르기부터 표시한다.

    춤음악의 빠르기(속도, pace)는 보통 1분 동안에 몇 소절을 연주하는가의 BPM(bar per minute)으로 나타낸다. 즉 3박자의 왈츠 속도가 29BPM이라면 이것은 1분 동안에 87박(29소절×3박)을 연주하는(치는) 것이다. 춤의 속도 단위인 BPM은 음악의 빠르기 단위인 M.M.과서로 표현이 다르지만 근본적인 원리는 동일하다.

 

 

     나. 삼바(samba)

    라틴춤 중에서도 아프리카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면서도 모던(modern)춤의 요소가 많이 섞여서 역동적이고 재미있는, 전형적인 혼성춤이 곧 삼바다. 2/4박자로 추는 삼바는 일정한 비트(beat, 拍로)로 추는 무릎 바운스(knee bounce)와 신코페이트된 휘스크(whisk)가 결합된 춤이다. 여기서 무릎 바운스는 삼바의 펄스(pulse, 脈搏)라고 할 수 있다.

    4분음표(♩) 1박을 1차 분할(division)하면 두 개의 큰 비트(♩=♪+♪ 1=½+½)가 생기고 2차 문할 하면 네 개의 작은 비트(, 1=¼+¼+¼+¼)가 생긴다. 작은 비트 셋을 붙임줄(tie)로 묶으면 ¾()의 길이가 되고 나머지는 ¼이 되는데 이것이 whisk 리듬(, ¾+¼)이다.

    무릎 바운스는 항상 큰 비트로 down and up 되고 휘스크의 체중 이동은 작은 리듬 (¾)이 다운 바운스와 함께 시작하고 나머지 (¼) 업 바운스 뒤에 넣는데 이때 ¼에 해당하는 체중은 될수록 순간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삼바는 한 발로 추는 춤이라고도 한다.

    삼바는 하나의 몸으로 바운스와 휘스크가 어긋나는 두 리듬을 춘다. 음악에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독립된 리듬성부가 동시에 진행되는 현상을 겹(複)리듬(poly rhythm)이라고 한다. 그러나 삼바의 바운스와 휘스크는 겹리듬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리듬을 큰북과 작은북으로 나누어 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큰북에 해당하는 바운스 리듬을 큰(large) 리듬, 작은북에 해당하는 휘스크 리듬을 작은(small)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삼바의 바운스와 휘스크는 하나의 리듬(홑리듬)을 분리(separation)한 것에 불과하다.

    자이브와 삼바는 아래의 A와 같이 리듬이 진행될 때 춤의 동작은 B와 같이 진행된다. 이때 음악과 춤의 리듬 형태를 관점에 따라서 겹리듬으로 볼 것인가 큰 리듬과 작은 리듬으로 분리된 홑리듬으로 복 것인가의 문제가 생긴다. 음악연주와 춤추는 사람을 각각 독립된 성부(聲部, part)로 보면 겹리듬이 될 것이고 음악과 춤의 밀접한 관계로 보면 홑리듬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음악과 춤의 관계로 보아서 홑리듬으로 봄이 타당하겠다. 왜냐 하면 겹리듬의 요건은 보다 복잡하고 정밀하게 독립된 성부가 동시에 진행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자이브나 삼바의 휘스크와 같은 스킵(skip, 跳躍) 리듬으로 추는 춤은 체중을 볼(ball)에 둠이 자연스럽다.

 

                                                       

 

 

 

    춤은 인간의 육체 속의 기쁨, 표정적인 몸짓에 대한 사랑, 그리고 율동적인 움직임을 통해 긴장을 완화시키는 특성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삶의 즐거움을 드높이는 동시에 사회생활을 비추는 거울도 된다. 삶의 즐거움을 드높임은 춤의 신명으로 인생의 간접자본(social overhead capital)을 축적함이요 사회생활을 비추는 거울이란 춤의 자유를 존중할 줄 아는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말함이다. 이것은 인간 삶의 간접자본으로써 보다 높은 단계의 삶을 누릴 수 있는 행복한 확인이다.

    음악의 목적은 여러 사람의 소리와 마음을 조화하는 합주(ensemble: together라는 뜻의 프랑스어)에 있다. 서양에는 뛰어난 합주를 자랑하는 백년이 넘는 교향악단이 적지 않다. 이것은 음악을 사랑하는 그들 사회의 탁월한 저력을 웅변하는 것이다. 왜 음악을 사랑하는가? 그것은 음악을 통하여 개인과 사회의 공유자본을 형성함으로써 행복한 삶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춤도 마찬가지다.

    우리 나라는 조선조 500년 동안 유교의 암흑시대가 있기 전까지는 자유분방한 세상이었다. 유교는 조선 사람들에게 삼강오륜(三綱五倫)같은 덕목으로 개인 사이의 처신만 강요했지 사회나 국가와 같은 공동체와의 조화는 가르치지 않은 관습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런 사회에서 음악과 춤이 제대로 기능하고 발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지금 남아있는 전통음악과 춤의 레퍼토리(repertory)가 그리 풍성하지 않다.

    뉴욕의 흑인들은 자주 집세 파티를 열었는데 이것은 집 없는 사람에게 집도 마련해 주는 동시에 재즈음악과 오늘날 흑인계의 라틴춤이 세상에 퍼져나가는 큰 계기가 되었다. 음악과 춤이 무형의 사회간접자본임을 아는 사회일수록 열린 사회이다. 또 댄스스포츠는 힘의 이동이 다양한 조화의 세계임을 아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며 성공한 사람은 춤을 쉬지 않는다.

 

 

       -참고-

      holler song: 흑인 노예가 노동을 하면서 동작에 맞추어 외치는 고함이나 목소리. 노동의 종류에 따라 work-holler, river-holler, fishman-holler 등이 있다. 길게 외치는 소리는 기복이 심하고 기성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창법은 서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서 녹음되었는데 주로 넓은 들판에서 경작을 했던 세네갈이 대표적인 곳이다. 할러는 그 감성과 표현의 유사함으로 인해 블루스의 선례였다고 할 수 있다 ‘블루스 시대’에 싹이 트고 캔사스 시티(KC)에서 자란 샤우트(shout 절규) 창법은 훗날 할렘에 뿌리를 박고 ‘리듬 앤 블루스’라는 흑인 파퓰러 음악으로 발전하였다.

      spiritual: 흑인 노예들에게 백인 고용주나 성직자가 준 포교를 반영한 흑인 특유의 신앙가. 가사 내용은 구약성경을 바탕으로 내세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으며 음악적으로는 유럽계의 찬송가와 아프리카계로 보이는 5음음계 선법, syncopation rhythm이 조합되어 있다. 흑인영가와는 별도로 백인 개척자에 의해 만들어진 white spiritual도 있는데 이쪽은 일반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work song: 흑인 노예 또는 죄수의 노동가. holler가 바탕이 되어서 가곡화된 것으로 노동의 동작에 맞추기 위해서 리드미컬한 곡이 많고 민요로서 오늘날 흔히 불러지는 것도 있으며 재즈의 소재도 되고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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