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의 神品名詩]바위의 말
이근배 시인·신성대 교수
동아일보 입력 2016-01-20 03:00:00 수정 2016-01-20 05:25:54
동아일보 사진/전남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바위의 말 ―이성부(1942∼2012)
나는 오랫동안 너무 게을렀거나
한자리에서만 맴돌아 생각이 굳어졌거나
그리움으로 목말라 바윗덩이가 된 것은 아니다
내 안에는 아직도 더운 피 터질 듯 힘차게 돌아 흐르고
이리 무겁게 앉아 있어도
갈수록 눈 깊어져 천만리 머나먼 바깥세상
잘 보이느니
사람들의 짠하고 아픈 사연 찾아 듣느라
귀가 늘어져서
정작 가까운 솔바람 소리 개울물 소리 따위는
귓가로 흘려버리고 말았느니
해남 두륜산 자락 포근함에 파묻혀서
멀리 일렁이는 산 구비 너머 바다 건너를
나는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곧 내가 일어나 입을 열어 말할 것이고
세상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내려갈 날도 멀지 않았다
멀고 먼 도솔천(兜率天)에서 여기 백두대간이 세운 불국정토의 높은 봉우리까지 찾아오신 미륵부처님! 사바세계에 걸어 나오시려면 석가모니께서 열반하신 지 56억7000만 년이 걸려야 된다고요? 그날이 오면 모든 중생이 번뇌와 고통을 벗고 고르게 잘사는 용화회상(龍華會上)의 낙원이 된다고요! 그러면 겨우 즈믄 해 눈, 비, 바람 맞으며 안으로 삭이시는 화두(話頭)는 언제쯤 깨치실 건가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되었다는 전남 해남 두륜산 대흥사에서 개울을 건너고 돌길을 숨 가쁘게 올라가면 멧부리에 가로 8m 너른 바위에 새겨진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大興寺北彌勒庵磨崖如來坐像·국보 308호)이 앉아 계신다.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방해하려는 땅 밑의 악마들을 제어하는 자세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오른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자세)’으로 결가부좌하고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이 마주한 대좌가 저 토함산석굴암 대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고려 초기의 대표작이며 우리나라 마애불 가운데서도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히는 이 부처가 미래불인 미륵으로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몇 년 전 마애불 앞의 전각에서 발견된 상량문에서 밝혀진 이후부터다.
발로 백두대간을 누비며 시를 쓴 이성부 시인은 몇 번인가 이 부처를 마주하였을 것이고 저 땅끝마을 건너 다도해에 눈을 주고 있는 바위 속 부처님의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너무 게을렀거나…’라고 운을 떼고 ‘뚜벅뚜벅 걸어 내려갈 날도 멀지 않았다’라고 했으니 우리 괴로움, 슬픔 없이 사는 날 정녕 가까이 오고 있으려나. 이근배 시인·신성대 교수
▼ 아래는 제가 2008년 2월 8일 대흥사에 머물렀을 때(temle stay)입니다.
-참고문헌들-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7604)는 자신의 가사와 빌우를 대흥사에 보관하라고 제자 유정(사명당)과 처영에게 유언했다. 정찬주, [茶人기행](파주: 열림원, 2006), 25쪽
글/목정배ㆍ이응묵ㆍ이완우, 사진/김종섭ㆍ이응묵ㆍ이완우, [대흥사(대둔사)], 서울: 대원사, 2005.
서산대사의 다시(茶詩)
낮에는 차 한 잔 하고
밤이 되면 잠 한숨 하고
푸른 산 흰 구름
더불어 무생사(無生死)를 말함이여
晝來 一梡茶
夜來一場睡
靑山與白雲
共說無生死
정찬주, [茶人기행], 파주: 열림원, 2006.39쪽.
정찬주, "귀속의 귀가 열리고 눈속의 눈을 뜨라," [절은 절하는 곳이다](서울: 이랑: 2011), 270쪽.
▲ 해남 대흥사 원종대가람(2008. 2. 8)
▲ 대웅전 천정
▲ 내가 하루밤 묵었던(temple stay) 요사 빗장
▲ 내가 묵었던 요사 횃대(掛. 옷걸이)
▲ 내가 묵었던 대흥사 요사, 침구와 내 짐들.
내가 묵었던 요사는 건물 한 채였다. 2008년 2월 9일 아침 대흥사를 떠날 때 공양깐 보살들이 내게 준 대형 떡가래는 참말로 맛있는 선물이어서 그 인상이 지금도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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