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송이 들꽃을 위하여
(’95 여름방학 가정 통신문)
사랑하는 영음가족 여러분!
장마와 태풍은 거짓말처럼 지나가고 이제 폭염의 계절입니다. 여러분은 젊고 건강하지만 그럼에도 연일 계속되는 일사(日射)의 기승을 넘겨가는 슬기가 있음을 알고 저으기 안심은 합니다. 하지만 방학이 길어서 첫째로 여러분의 안부가 궁금하고 매일매일 면학과 연습의 열기로 가득 차던 학교 연습실이 오랫동안 텅 비어 있으니 그저 허전한 마음이 이렇게 편지를 쓰게 하나 봅니다.
저는 음악대학에 재직한 이래 부족하지만 학풍(學風)을 세우고자 부단히 노력하여 왔고 학장에 부임한 후에도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등 교수 첫 부임 때의 생각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단지 저 뿐만이 아니고 모든 교수님들이 다 마찬가지일 것이라 믿습니다.
목적이 좋으면 방법도 좋아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목적을 위한 방법에서 여러분에게 실수를 저지른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잔디밭을 가로 지르는 학생에게 그렇습니다.
푸른 잔디는 어디서나 인간에게 무의식적인 안정감을 갖게 합니다. 안정감이란 편안한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편안한 마음의 상태란 인간의 기(氣)가 상승할 수 있는 원천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기를 자연에서 얻습니다.
보십시오! 새봄이면 우리 대학 앞의 잔디밭에서 피어나는 들꽃들을! 그것은 뿌리지 않고 가꾸지 않아도 제대로 피는 노란 민들레입니다. 민들레는 꽃이 지면 안개꽃이 됩니다(이것은 기의 전환입니다). 더구나 키도 작고 꽃도 볼품이 없어서 유달리 가련해 보이지요. 아마 음악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민들레의 모습에서 가련미(可憐美)를 느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거야 말로 진한 정서에 다름 아닙니다. 민들레의 참 아름다움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민들레는 하늘이요 흙이요 바람입니다.
민들레는 사랑이요 자유입니다.
이제 gospel singer 홍순관씨의 위촉으로 작곡된 저의 국악가요 [민들레]의 악보를 동봉하는 것으로 민들레 이야기는 그만 하겠습니다. 내년 봄에는 잔디 언덕이 민들레로 가득 피어 있기를 바라면서……
몇 걸음에 지나지 않는 잔디밭을 가로 지르는 것은 어떤 성취 목적보다도 거의 심리적 이익 때문일 것입니다. 이 심리적 이익은 때때로 인간에게 에토스(ethos, 윤리ㆍ도덕)의 문제를 생기게 하고 큰 사건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개학하면 잔디밭을 한번 유심히 보십시오. 조금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방학 중에 잡초를 제거했거든요. 그리고 건물 뒤의 잔디밭에서는 자갈을 골라냈습니다.
잔디밭을 걷다가 제게 야단맞은 학생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면서 여기서 잔디밭 이야기도 그치겠습니다. 아마 졸업생 중에는 벼락같은 꾸중을 들은 사람도 있을 것이니 그들에겐 더욱 깊은 사과를 드립니다.
제가 여러분을 꾸중하면서도 내심으로 기뻤던 것은 아무리 세태가 변했어도 여러분은 여전히 한국의 좋은 가풍(家風)에 젖어서 생활하고 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미래에 있어서 인간완성의 분명하고 낙관적인 예시와 같은 것입니다.
날씨도 덥고 방학이어서 그런지 흔히 슬리퍼와 심히 노출된 복장으로 등교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더우면 벗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또한 오성(悟性)조차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남녀가 모이는 학교와 같은 공공의 장소에서는 복장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집안에서나 밖에서 의관(衣冠: 옷과 모자)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선비 됨의 오성이요 상징이었습니다. 특히 선비가 많은 우리의 영남지방에서는 더욱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후예임을 자긍한다면 많이 덥더라도 충분히 참아낼 수 있습니다. 특히 여학생에게 있어서는 ‘가림’과 ‘드러냄’의 균형 감각이 진정한 의상미(衣裳美)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날씨가 더우면 또 한 가지 주차 문제가 생깁니다. 그늘을 찾아서 건물 북쪽의 숲이나 연습실 옆에 차를 세우는데 이것은 누구보다도 연습이 관건인 음대생에게는 커다란 공해 이상의 문제입니다. 건물 주변의 green belt는 여러분의 연습에 활기를 북돋아 주는 신선한 공기의 샘입니다. 뜨거운 태양열에 자동차가 조금 달구어지더라도 주차 질서를 지켜 주십시오. 여러분은 차를 소유한 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편의와 남다른 기동성을 갖춘 것입니다.
편지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한 가지 더 전할 일은 그다지 기쁜 것이 아닙니다. 방학 중에 치밀하고 계획적인 악기 도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거야 말로 참으로 불미(不美)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각자의 악기가 모두 고가(高價)일 뿐만 아니라 귀중한 음악재산이니 항시 챙기는 습관을 더욱 높이기 바랍니다. 악기는 음악가의 분신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래의 편지는 지난 겨울방학 때 써두었으나 그만 저의 불찰로 발송치 못했습니다. 이 편지는 주차 위반시에 또는 잔디밭에서 개인적으로 받은 사람도 있지만 여름에 겨울 편지를 받아보는 것도 별다른 정취가 아닐런지요?(여름에 받은 겨울편지!)
그러면 사랑하는 영음가족 여러분! 기쁜 표정으로 만날 개강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감사합니다.
1995. 7. 27. 음악대학장 이 해 식
(겨울편지는 생략)
1994. 7. 홍순관의 우리 노래 CD [민들레 날고] (주)오아시스(문화부등록 제16호)
작사ㆍ노래/홍순관, 작곡/이해식.
젓대/이준호ㆍ해금/정수년ㆍ18현금/이지영ㆍpercussion/김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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