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학교

영대신문:: 새로운 국악의 모색. 1982. 3. 31.

노고지리이해식 2006. 8. 20. 12:11
 

 영대신문  1982. 3. 31. 

새로운 국악의 모색.  한국적 가락의 재발견 

 

 

새로운 국악의 모색


한국음악을 통틀어서 국악이라 부르며 전통문화로서는 민속(民俗)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전통이라면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으나 어느 의미이든 간에 우리가 살아오고 살아가면서 남기는 발자취가 전통이요, 그 기층(基層)이 민속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삶의 맥락 속에서 불행하게도 우리 세대는 전통문화, 특히 국악과는 그리 흔한  접촉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마치 혈육을 멀리 두고서도 단절된 상태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격동기의 역사적 원인이나 정책적, 또는 교육에도 원인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걸핏하면 국악의 현대화라 하여 극히 피상적인 인식으로 서구적인 재편성을 한다든가 서양적인 기준에 도달시키려 하는 왜곡이나 오류가 주로 방송 매체에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순수하게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문화의 흐름을 먼저 알아야겠다. 그럼 현재 상황에서 우리는 가장 순수하게 한국적일 수 있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는가? 다행히 우리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통하여 우리의 얼굴을 확인해보려는 노력이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점은 있다. 우선 한국음악을 서구적인 방법으로 분석하려는 경향 때문에 독특한 산조(散調)를 오선보로 채보해서 배우고 아정화락(雅正和樂)한 정악(正樂)을 오선보로 역보(譯譜)해서 배우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다. 한 사람이 하나의 산조음악을 아침에 연주하고 저녁에 연주해보면 그 흥이나 가락이 바꾸어지는 것이 특성이거늘 이것을 서구의 합리적 견해에서 틀을 잡으려함은 억지이다. 서양의 악보로는 한국전통음악의 이미지를 읽기 어렵다. 재래적인 산조의 교습법은 구음(口音)이며 이것은 구전심수(口傳心授) 한다.

한국음악은 보이지 않는 형상 그 자체이며 나아가서 철학적, 윤리적, 그리고 무속적 차원에서 서양음악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을 이해하지 않고는 한국음악을 분석할 수 없다.

반음(半音)은 인간의 감각에 강력한 충동을 주는 하나의 발동기적(發動機的) 음악이라고 K. Reinhard는 말했다. 이와 같은 원리로 중세의 교회선법(敎會旋法)은 반음의 위치에 따라서 그 특징을 달리하며 오늘날 현대음악에서도 용도가 크다. 반음을 또 반음씩 나누면 미분음(微分音)음에 이른다. 이 미분음이야말로 한국음악 중에서도 특히 민속음악의 혈액이며 핵심적인 구성음(構成音)이다. 이 순정적(純正的)인 미분 음정이 국악 보급에 저해되고 국제적인 진출에 방해된다 하여 국악을 평균율화(平均率化) 하자고 주장하는 측도 있다. 그러나 평균율화된 것은 이미 국악이 아니다. 민족음악으로써의 혼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그러면 국악 쪽의 한 가지 현상을 앞에 언급한 산조음악을 가지고 살펴보자.

민속은 끊임없이 흐르며 변모된다. 민속음악도 그렇다. 독주로써 연주할 때마다 달라지는 산조는 장단이라는 패턴에 의해서 매듭을 이어간다. 이 매듭은 프레이징의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의 산조 연주에서는 즉흥성의 멋은 찾아볼 수 없으며 너무나 세련된 나머지 그 틀이 고정되기까지 하였다. 산조의 즉흥적인 특징을 원천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보다 고정시켜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쉬워서라면 이건 교육의 폐단이 아닐까?

산조는 글자 그대로 허튼 가락이다. 이 허튼 가락에 맞추는 허튼 춤을 제대로 시골 냄새가 물씬 풍기게 추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순박한 춤사위는 한국무용이란 허상아래 맹랑하게 도시화되어 버렸다.

금세기 가야고의 명인 심상건(沈相健 1889~1965)은 연주할 때마다 즉흥으로 산조를 탄다. 그러나 우리들은 대학에서 진양조 한 판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졸업하는 일이 흔하다. 바꾸어서 말하면 피아노 전공이면 두 세 곡 정도의 협주곡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중고등학교의 음악교과서는 서양음악 한국음악이 각각 50%씩 배정된다.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중고등학생들에게 어떤 국악을 가르쳐야 할 것인지 국악계에선 그 방안을 빨리 준비해야 할 것이며 국악교사 양성이나 기존 교사의 국악연수도 시급한 일이다.

지역사회의 국악을 살펴보자.

우선 경북지방만 하더라도 민속문학이나 구비문학의 채록이나 학문적 연구는 이 지방 선학(先學)들에 의하여 괄목할 만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음악분야의 민용연구나 수집은 거의 관심 밖이다. 필자가 10여 년 동안 경북지방을 중심으로 현장조사한 결과로는 영덕이나 구룡포의 해안지방이나 선산평야엔 훌륭한 민요들이 많이 산재해 있다. 이 민요들은 그대로 보존되거나 현상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근래에 와서 급속히 소멸되어 가고 있다. 이 지역에 음악교육기관이 많고 또 국악과도 설치되었으므로 지역사회의 민요 채집에 관심을 두어야겠다.

서양음악사를 살펴보면 스페인이나 발칸반도의 음악, 러시아에서는 무소르그스키에서 스트라빈스키에 이르기까지 농민음악이 그들 작품구성의 밑바닥이 되고 있다. 농민의 민속음악을 장식적으로 사용하거나 일부분으로 섭렵한 것이 아니고 천착(穿鑿)을 거듭하여 음악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로 돌아가서 세계적인 현대음악을 창조해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내에서도 국악에 관심을 돌리며 작품의 모티브로 국악을 원용하는 사례가 많아졌음은 사실이지만 아직 초기 상태에 불과하다. 먼저 국악에 대한 종래의 그릇된 인식을 버리고 보다 깊이 심층을 파고들며 연구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우리는 전통적인 국악을 고스란히 보존전승해야 하면서 새로운 국악을 창작해내야 한다. 새로운 국악이란 서양 화(化)가 아니라 전통국악에 뿌리를 두면서 창작의 새로운 관점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명이 이제 우리 영대인(嶺大人)들의 어깨에도 지워져 있는 것이다.    이해식<음대ㆍ국악과ㆍ전강>  1982. 3. 31. [嶺大新聞], 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