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대신문 1982. 4. 21.
유종의 미로써의 교육
인간이 출생한 후 성장하여 성년이 되는 의식을 관례(冠禮)라 하고 결혼하는 의식을 혼례(婚禮)라하며, 인간이 죽었을 때 갖는 의식을 상례(喪禮), 그리고 죽은 후의 제사를 제례(祭禮)라 한다.이와 같은 인간 삶의 순서를 <관ㆍ혼ㆍ상ㆍ제>(ceremonies of coming of age, marriage, funeral, and ancestral worship)라 하여 인류학 분야에서는 통과의례(通過 儀禮 rite of passage)라 부른다. 관ㆍ혼은 생존 시에 당사자가, 상ㆍ제는 사후에 후손에 의하여 치러지며 관습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
관례를 치르고 의관(衣冠)을 갖추게 되는 시기를 우리 세대에서는 주민등록증을 소지하게 되는 시기부터라고나 할까? 그런데 여기서 얘기코자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성년이 성년의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혼례까지 치른 남자가 자기의 친모(親母)를 “엄마”라고 부른다는 것은 아무래도 유아병적이요, 더구나 자기 아이까지 둔 남자가 아이의 할머니를 “엄마”라고 호칭하는 것을 상상해 보자 이런 사람은 백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세태의 일부이며, 아버지를 “아빠”라 부르는 것이 일상화되지 않은 것만이라도 다행으로 여겨야겠다. 이것이 서구생활의 영향이라면 크게 잘못 받아들여진 것이다. 북구(北歐)의 핀란드에서는 남자가 18세만 되면 양친 곁을 떠나서 독립생활을 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등학교까지 졸업시키면 19세, 즉 만18세가 되는 셈이다.
부모의 양육 의무나 교육 부담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과보호(過保護)라는 생활상으로 자녀에 대한 뒷바라지는 계속된다. 맹목적인 과보호 속에서 성장한 사람은 궁핍을 실감하지 못하며, 스스로의 노력과 경험 부족으로 자기 성취감이 부족할 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경험 부족은 대인 관계로 이어져서 타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게 되며 수단 방법은 질서를 지킬 수 없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가 송죽(松竹)을 절개와 의지의 상징으로 삼는 것은 온실이라는 과보호가 아니라 노천이나 야산에 내던져진 채 온갖 풍상(風霜)을 맞고서도 사철 푸르름을 간직하기 때문이 아닌가?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이 없다지만 풍대작우(風雨大作)의 경험이 많은 나무일수록 강한 나이테를 간직하는 것이다.
노력 없는 성취감이란 마치 야행성(夜行性)의 유흥과 같은 것이어서 의례히 하릴없는 허무감이 따르게 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초적으로 개체(個體)이다. 이 성장된 개체를 과보호하는 것은 의타심을 잉태하게 하는 것이요 과시욕에 사로잡힌 부모의 우둔인 것이다. 의타심은 협동심의 상대적 심리이니 사회나 국가의 구성원임을 망각케 한다. 내가 호강스럽게 자라지 못했으니 내 자식들만은 누구보다 특별하게 키워야겠다는 애틋한 정(情)이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비합리적 보상심리일 뿐이요, 외적으로는 과시욕일 뿐이다.
과보호는 지혜가 아니고 오히려 장애이다. 지금도 “엄마”라 부르는 성년이 있거늘 어머니를 향하여 <노라>처럼 탈출해 보라. 성취감이 자기만의 노력으로 쟁취될 때를 진정한 보람이라 할 것이다.
매년 입시 철이면 대학의 교문밖엔 학부모들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본다. 이즈음이면 날씨조차 심술을 부려서 마치 어린 아이를 물가에 두고 온 듯한 부모들의 모습은 더욱 안절 부절이다. 한편으로는 입시생을 수송하는 교통기관의 에피소드가 치열한 교육열을 식혀주는 미담으로 보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입시장에 들어가는 자녀들이 19세가 넘은 성년들이니까 앞으로는 혼자 들어가면 좋겠다. 그 바쁜 출근 시간에 대학생 될 사람을 유치원생 손잡고 가듯이 하면서 교통지옥을 더 만원 사태가 되게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대신 시험을 치룰 수는 없는 법, 출전(出戰)하는 청년에게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빌어야지, 전장(戰場)에까지 따라나설 수는 없지 않은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과보호는 부모의 보상심리나 과시욕에서 결과되는 수도 있겠으나가옥 구조나 핵가족제도에도 원인이 있겠다. 아파트 주거는 한 개의 문으로써 밀폐가 가능하며 밀폐의식은 외부에 대한 심리적 경계의식이다. 고층 아파트에 자녀를 두고 출근하는 부모들은 무의식 중에 자녀들의 안위를 걱정하게 된다. 한 편으로는 아파트라는 서구적인 집단주거방식이 우리 나라에서는 속칭 땅집(단독주택)에 비하여 편리하고 이색적이 주거로써 투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아파트 구조는 대가족이 기거할 수 없다. 땅집 생활에 젖은 노인이 고층 생활에서 오는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저승으로 직접 투신한 예도 있다. 이러한 생활방식의 변천은 우리의 전통적인 의식(儀式)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즉 예절은 가정교육과 직결되는데 가끔 기본적인 예절을 모르는 젊은이를 대하게 되면 어쩐지 우쭐해지며 헛된 일인 줄 알면서도 젊은이의 가정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우리는 교육이란 가정과 학교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교육을 학교에 완전히 맡기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가정에서도 온전한 교육이 이루어지지도 않는 것 같다.
교육(敎育)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이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나 나름대로 풀이한다면 처음과 끝을 분명히 할 줄 아는 습관을 길러주는 것이 교육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끝을 분명히 한다고 해서 <유종의 미>(有終之美)를 거둔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불행히도 우리 주변엔 유종의 미보다 <유종의 추>(有終之醜)가 많음을 어쩌랴. 금전 거래의 불분명, 소풍이 끝난 유원지, 운동 경기 끝난 스탠드, 강의가 끝난 강의실 등등, 수없이 많다.
그런가 하면 자고로 우리 민족은 끝내는 것엔 분명했던 것 같다. 그 한 예로 옛날 서당에서 한 가지 공부가 끝나면 훈장(선생)과 제자 사이의 정을 나누는 <책거리>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지금 대학가의 <개빙고>(개강을 빙자한 고고파티)나 <종빙고>(종강을 빙자한 고고파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책거리 의식은 다음 어려운 책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논리가 비약되겠지만 관혼은 기쁨의 끝이요 행복의 끝으로써 슬픔과 곡성(哭聲) 상례가 닥치는 것이 인생유전(人生流轉)이거늘 젊은 시절에 책거리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 성공의 여신은 손짓을 할 것이다.
한국음악에 처음 시작을 알리는 다스름이란 것이 있다. 이것은 음악의 특성인 시간의 일치 외에 지극한 마음의 일치를 요한다. 물론 끝을 알리는 뒤풀이라는 것도 있다. 굿을 할 때는 모든 더러움과 부정을 치우는 부정풀이로써 시작하고 끝을 맺는 뒷전이 있다.
서야음악에서는 끝맺음을 종지(終止)라 한다. 이것은 곡을 완전히 끝맺는 기능과 함께 음악을 전개시키는 구두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음악사에서 불후의 명작일수록 이 끝맺음(終止)이 잘 배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역시 서양음악도 처음 시작을 알리는 서주(序奏 introduction)가 있다.
교육(敎育)이란 무엇인가? 동양적인 의미로는 매질로써 <효>(孝)를 가르치는 것이다. 효는 윤리와 직결되는 것이며 부담이 아니라 우러남이다. 이 우러남으로 통과의례 중에서 상례와 제례를 정성으로 감당해야 한다. 고대 중국의 [예기](禮記)에서 음악은 곧 윤리의 길로 통한다(惡子通倫理也)고 했다. 이 말을 음미해 보면 음악의 근원적인 원리에 닿게 된다. 음악의 원리는 처음과 끝의 구성이며 그 근원은 인간의 호흡이요, 심장이 된다. [예기]는 또 오직 군자(君子)만이 음악의 원리를 알 수 있으며(唯君子爲能之樂), 예와 음악을 참으로 앎으로써 비로소 유덕한 선비라 할 수 있다(禮樂皆得謂之有德)고 했다. 뒤집어 말하면 음악의 원리를 모르고서는 임금도 선비도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생활의 원리를 망각하는 데서 과보호는 발생한다. 과보호에는 두툼한 정이 흐르지만 정이란 비합리적일 때가 많다. 비합리 속에서 자라면 이기심이 많아진다. 자라는 어린이에게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려주라. 그것은 합리적이면서 지극히 사랑스러우며 생동적(生動的)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허물로 가리어진 과보호는 지식을 포화상태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르나 유태인 같은 지혜는 결코 가르쳐 줄 수는 없다. 혼(魂)이 왕성하게 활동할 때 지혜는 샘 솟는다. 플라톤은 이 혼을 형성하는 교육의 방법으로 음악을 들고 있다.
젊은이여! 그대의 혼을 리듬으로 일깨우고 “엄마”나 “아빠”같은 과정은 텔레비전의 퀴즈게임처럼 빨리 통과해서 성년의 의관을 쓰고 “어머니”와 “아버지‘에 이르라! 어머니는 무한한 사랑의 세계이며 아버지는 능력의 세계다. [嶺大新聞], 1982.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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