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ㆍ특강

나의 작품을 남이 어떻게 보는가?(2001)

노고지리이해식 2012. 1. 13. 02:33

 

본문은 [작곡가 8인의 고백]이라는 논제로 2001. 5. 17. 중앙대학교 중앙음악연구소 제6회 음악학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논문을 첨삭한 것이다. 장소: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음악감상실. color는 內註이다. .

 

 

 

나의 작품을 남이 어떻게 보는가?

 

 

이해식(영남대 교수)

 

 

 

 

<차 례>

 

 

 

 Ⅰ. 처음

 Ⅱ. 중간

     1. 실내악 「바람의 춤」(風舞) 

     2. 무용음악 「갈숲」

     3. 18현금독주곡 「줄풀이 제2번」

     4. 관현악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5. 和絃 거문고독주곡 「고풀이」(琴解)

       6. 論外: 인터넷 게시판 -1-

       인터넷 게시판 -2-

Ⅲ. 나중: 12현금독주곡 「흙담」

       참고 문헌

 

 

 

Ⅰ. 처음

 

흔히 한국의 전통음악은 레퍼토리가 많지 않다고 한다. 이 말은 내가 KBS- Radio와 FM에서 국악 프로듀서일 때 전통음악의 빈곤을 절실하게 느꼈던 상황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의 왕조에서는 음악이 필요할 때마다 작곡한 게 아니라 동일한 음악을 곡목만 바꾸어서(同曲異名) 사용한 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만약에 창작의 막강한 위촉자였을 왕조의 음악기관에서 행사 때마다 새로운 창작음악을 연주했더라면 오늘날 전승되는 전통음악은 보다 풍성하고 국악사의 방향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이 있을 수 없는 역사의 결과는 항상 필연을 가져온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국악 창작음악이 시작된지도 50여 년이 넘었고(본문에서는 “韓國音樂創作史,” [國樂沿革](서울: 國立國樂院, 1982), pp. 193~246을 소개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창작국악의 개관을 대신한다) 본격적인 국악사가 출판되고 있다(국악사로는 李惠求․張師勛․成慶麟, [國樂史](서울: 韓國國樂學會, 1965) 이후 여러 국악사가 출판되었으나 본문에서는 그 개관을 생략한다). 音樂史는 작곡가의 사상과 작품(악보)과 음악사회사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출판한 세 권의 작품집과 두 장의 음반은 우리 국악사에 조그만 보탬이 될 것이다.

 

李海植, 國樂管絃樂曲集 [海東新曲], 慶山: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3.

李海植流 國樂器獨奏를 위한 創作曲集 [흙담], 慶山: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李海植, 국악관현악곡집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서울: 圖書出版 수문당, 1990.

 

李海植 創作曲集 LP 「바람과 여자」, 서울: 서울음반 SRB-019, 1992.

이해식 국악작곡집 CD, 「바람과 춤터」, 서울: 예성음향 YSCD-008, 1999.

 

본문은 나의 작품에 관한 비판적인 비평을 수집하고 이 비평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작품 자료를 나열함이 주된 내용이다. 대상 작품은 아래와 같다.

 

실내악 「바람의 춤(風舞)」(1979)

관현악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1990)

무용음악 「갈숲」(1989)

18현금독주곡 「줄풀이 제2번」(1989

거문고독주곡 「고풀이」(1998)

12현금독주곡 「흙담」(1969)

 

내 작품에 관한 비판적인 비평을 집필하는 까닭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칭찬을 듣고 싶어하는 반대편에 서서 나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보려함이요, 칭찬이 아닌 어떤 의도의 비판이라도 공개하는 데 조금도 주저할 까닭이 없음은 나와 내 작품이 활성적인 비판가운데에 있을 때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며, 동시에 신선한 자극과 창작의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작곡노트.는 작품에 관한 생각이랄까 구상과 인생관이고, 프로그램에 쓰인 <해설>은 바로 이 작곡노트이다.

작품이 연주되기 전에 청중이 읽는 작품 해설은 작품에 대한 첫 인상과 선입감이 좌우되므로 일단은 치밀한 정성으로 써야한다. 해설에 부실한 구석이 있으면 작품도 부실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어떤 해설이던지 감상에 지대한 도움이 된다거나 연주결과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Ⅱ. 중간 

 

흔히 음악회에 모인 사람들을 聽衆이라 하지 않고 觀衆이라고 한다. 만일 술을 눈으로 마신다면 얼마나 觀照的이고 貫流的인 발상인가?. 이것은 음악을 청각을 넘어서 시각적으로, 또 미각을 시각으로 달관하려는 사람들의 표현이라 하겠다. 그래서 본문의 제목은 “나의 작품을 남이 어떻게 <듣는’가>?”가 아니라 “나의 작품을 남이 어떻게 <보는’가>?”이다.

루소는 그의 ?언어에 관한 에세이 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1764)에서 ‘색깔이 있는 음악’에 대하여 말한 바 있다(Peter le Huray and James Day, eds., Music and Aesthetics in the Eighteenth and Early-Nineteenth Centuries(Cambridge, 1981), p. 100. Peter Kivy(장호연․이종희 옮김), [순수음악의 미학](서울: 도서출판 이론과 실천, 2000), p. 17에서 재인용. ?순수음악의 미학?, p. 18의 각주(*)에서 오늘날의 시각적인 음악의 제작에 대하여 알 수 있다). 루소는 시각적인 음악을 만들려는 노력을 ‘귀의 자리에 눈을 두고 눈의 자리에 귀를 두려는 것’이라고 단언했다(Peter le Huray and James Day, eds., Music and Aesthetics in the Eighteenth and Early-Nineteenth Centuries(Cambridge, 1981), p. 100. Peter Kivy(장호연․이종희 옮김), [순수음악의 미학], p. 18에서 재인용). 자연도태라는 관점에서 볼 때 확실히 눈의 자리는 ‘생존’을 위한 감각으로서 가장 뛰어나다. 굴드는 ‘영장류’는 시각적인 동물이라고 했다(Stephen Jay Gould, Time's Arrow, Time's Cycle: Myth and Metaphor in the Discovery of Geological Time(Cambridge, Mass., 1987), p. 18. Peter Kivy(장호연․이종희 옮김), [순수음악의 미학], p. 18에서 재인용). 생존에서 시각이 갖는 가치는 명백하다. 시각은 여러 감각 가운데 정보량이 가장 많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물을 위치나 모양, 결, 색깔 등을 고려하여 가까이 있는 것으로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W. E. Le Gros Clark, The Antecedents of Man: An Introduction to the Evolution of the Primates(Chicago, 1960), pp. 266, 273, 281. Peter Kivy(장호연․이종희 옮김), [순수음악의 미학], p. 19에서 재인용).

여러 감각기관 중에서 시각의 정보량이 많다는 견해로 보면 오늘날 아주 편리하지만 음악을 폐쇄적인 방송매체나 음반매체로 듣기보다는 직접 연주회장에 가서 음악을 보고 듣는 무형의 정보량이 훨씬 더 많다. 무엇보다도 음악이 직접 연주되는 현장의 생동감은 시각을 통해서 가장 많이 享有할 있기 때문이다.

귀와 눈은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생득적인 기관이지만, 그것이 밝고 좋아지는 것은 후천적인 것이라 평소에 듣고 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밝은 귀를 가진 자는 미세한 바람소리 속에서도 수많은 음을 읽어낸다. 좋은 눈을 가진 자 또한 평범한 하나의 돌멩이를 보고서도 수많은 형체와 색깔을 읽어낸다(金海成, [現代美術을 보는 눈](서울: 悅話堂, 1993), p. 50).

본항에서는 앞서 예시한 여섯 작품 중의 기록들을 읽는 대목이다. 읽는다는 것은 곧 무엇을 보는 것이다. 가능한 한 귀로 하는 연구에 눈으로 하는 연구를 덧붙인다는 것, 즉 음악작품을 듣는 한편 ‘보는 것’도 아울러 권하고 싶다(Hugh Milton Miller(崔東善 譯), [새西洋音樂史](서울: 現代音樂出版社, 1990), p. 9).

굿과 춤이 내 모든 작품의 직접적인 구상소가 되는 까닭은 보는 음악으로써의 시각적 정보량을 증가시킴과 동시에 그것으로부터의 반사적인 감각을 누리려는 데 있다. 이에 관하여 나의 논문 “長短의 論理에서 創作으로,”에서 아래 인용처럼 간단히 피력한 적이 있다(李海植, “長短의 論理에서 創作으로,” [人文硏究] 第16輯(慶山: 嶺南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1994), pp. 498~499, 또는 李海植, “長短의 論理에서 適用으로,” [韓國音樂硏究] 第25輯(서울: 韓國國樂學會, 1997), p. 257).

 

음악은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볼 줄도 알아야 한다....무용가는 무용의 말을 전달하는 웅변가이며 한편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말로써 표현될 수 없는 언어를 전달하는 웅변가라 할 수 있다....그러므로 음악을 눈에 보이게끔 번역할 때에는 정확성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요구되는 것이다(Igor Stravinsky/安堯烈 譯, [音樂詩論], 서울: 檀國大學敎 出版部, 1981. p. 148).

 

또 이러한 시각적인 시도는 작품뿐만 아니라 “작품에서의 색깔 있는 움직임”(李海植, “작품에서 색깔 있는 움직임,” 1994년 국악의 해 학술회의 [2000년대를 향한 한국창작음악의 회고와 전망](서울: 한국국악학회․국악의 해 조직위원회), pp. 107)이라는 나의 논문 제목에도 반영되어 있다. 또 나의 작품 중에 치밀한 리듬을 색깔로 상징한 25현금독주곡 「冥想하는 사람을 위한 바람의 색깔」(금호갤러리 <영재콘서트 김민주 가야금 이야기, 그 두 번째> 위촉작품(작곡기간:, 2000. 8. 15~8. 26). 2000. 11. 7. 금호 리사이틀홀/서울)이 있다. 이들은 모두 소리를 시각적인 색깔 관련으로 표현하려는 작품이다. 색깔은 음조(tone)와 마찬가지로 진동의 역할을 한다(Irwin Edman(朴容淑 譯), [藝術과 人間](서울: 文藝出版社, 1989), p. 84). 그럼 실내악 「바람의 춤」으로부터 “중간”을 열어 가겠다.

 

1. 실내악 「바람의 춤(風舞)」

 

未來樂會 제4회 作曲發表會 위촉작품(작곡기간/1979. 11. ?.~1979. 11. 7). 단소/김철호, vocal/김영동, 해금/송권준․양경숙, 피리/사재성, 타악기/백효숙․김재운, 지휘/김용만. 1979. 11. 13. 국립극장 소극장/서울. 악보/李海植, 國樂管絃樂曲集 [海東新曲](慶山: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3), p. 230.

 

「바람의 춤」에 관하여

「바람의 춤」(風舞)은 <첫거리>․<징굿>․<둥당애타령>․<뒷거리>의 네 부분(section)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각 부분에는 여러 가지 의미소재들이 복합되어 있다.

작곡자가 1976. 8. 13. 밤 전라남도 해남군 문래면 우수영리에서 채록한 <둥당애타령>과 <절로소리>(해남의 <둥당애타령>은 李海植, 國樂管絃樂曲集 [海東新曲](慶山: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3), p. 231에, <절로소리>는 p. 233에 채보되어 있다)가 「바람의 춤」의 주된 소재이다. 부녀자들이 엎어놓은 바가지 위에 활을 올려놓고 활줄로 목화솜을 탈 때 공명되는 둥둥소리를 장단삼아 부르는 민요가 <둥당애타령>이다. <절로소리>는 해남 사람들이 논맬 때 부르는 들노래이다. 메기는 소리/박양래(여 42세).

조개(大蛤)와 농기구 홀태, 巫具인 방울․요령(두부장수종) 등이 악기로 편성된다. 대합조개과(大蛤科)의 바닷물 조개는 길이는 10㎝, 너비는 75㎜, 운두는 45㎜ 정도 되는 두 껍데기가 맞붙고 빛은 담갈색 또는 자흑색이다. 한국 서남 연해에서 많이 난다([국어사전](서울: 동아출판사, 1986, 三版), p. 466). 내가 자란 서해연안(변산반도)에서는 이 대합을 보통 生蛤이라고 부른다. 홀태는 원래 뱃속에 알이나 이리가 들지 않고 훌쑥한 생선(fish without spawn)이나 좁게 된 물건을 말하는데([국어사전], p. 2136), 이런 모양의 농구로 벼를 훑는다.

「바람의 춤」에서는 巫樂的인 리듬이 전곡을 이끌어 가는 動詞의 역할을 한다 문법의 명사와 형용사에 해당하는 것을 음악에서 찾을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동사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음악의 동사는 분명히 리듬일 것이다. 문법에서 동사가 그러하듯 리듬은 명사를 활성화시키고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Leonard Bernstein/朴鍾文 譯, [대답 없는 질문](서울: 主友, 1982), p. 77). 巫樂에 쓰이지 않는 두 개의 단소를 사용하는 반면, 무악의 필수 악기인 장고를 사용치 않는다. 이러한 破格은 <첫거리>부터 등장한다. 여기서 첫거리는 부정풀이라는 뜻이다. 부정풀이는 제사나 굿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모든 不淨을 치우는 prologue이다.

<징굿>은 악기가 낼 수 있는 최고음과 트레몰로로서 하늘에 告하는 祭儀를 상징한다. 채록민요를 바탕으로 한 <둥당애타령>은 음악과 언어의 측면을 본격적인 놀이(遊戱)로 재구성해 본 부분으로써 연주자들이 기악과 성악(vocal)을 겸한다. <둥당애타령>에서의 언어는 種의 특성을 가진다(Leonard Bernstein(朴鐘文 譯), [대답 없는 질문], p. 22).

민요와 그에 따른 언어는 보편적이다. 보편적인 언어능력은 인간이 타고난 천부적인 능력이며 인간정신의 특유한 능력을 확연하게 보여준다(Leonard Bernstein(朴鐘文 譯), [대답 없는 질문], p. 22). 이와 같은 언어의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람의 춤」에서는 매기는 소리를 monologue로, 받는 소리를 dialogue 성부로 하여 유희적으로 주고받는다. 이에 더하여 아래의 사진과 같이 대합껍데기의 운두에 구멍을 내어서 입에 물고 불거나, 요령과 방울, 그리고 농기구인 홀태발이 악기로 쓰인 <둥당애타령>은 언어가 가지는 種의 특성에 더하여 유희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유희는 음악의 직접적 내용이자 활동이므로(Leonard Bernstein(朴鐘文 譯), [대답 없는 질문], p. 14), <둥당애타령>은 음악․언어․유희(놀이)가 혼연일체가 되는 부분이다.

<뒷거리>는 굿을 끝내는 뒤풀이로써(epilogue) 풍속적․민속적․해학적인 언어기능을 가지는 동시에 음악미적 기능을 가지도록 궁리해 본 부분이다. 언어기능은 언어에 있어서의 발음은 진정한 대상이 아니고 그 언어가 의미하는 내용이 대상이 된다. 음악에 있어서의 음은 그 자체가 대상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음악은 틀림없이 감각적이다(金祥太, [音樂美學](서울: 世光出版社, 1981), p. 36). 「바람의 춤」에서의 언어기능은 충만한 음악적 감각과 관련하여 <뒷거리>에 나오는

 

울 밑에 잉어는 굼실굼실 노는데

이리 굼실 저리 굼실

어헐사 술 한 잔 감으로 너 논다.

 

라는 가사가 해학적인 언어내용이다.

예술은 우리들의 감각에 영향을 주는 것과 정신 또는 혼에 영향을 주는 것의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역할을 서로가 침투하여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감각적인 것을 포기하면 공허해진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은 감각적 존재이며 감각성을 예술의 생명조건이라고 말한다(金祥太, [音樂美學], p. 36). 「바람의 춤」에서 음악미적 기능이란 공허함이 없이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뒷거리>에서 논맬 때 부르는 <절로소리>가 애절한 피리 solo로 전개되면 단소와 해금이 간단하게 대위적으로 받는다

타악기로 전개하는 마지막 <막장>은 <징굿> 부분을 변주한 반복으로써 리듬의 강력한 動詞的 역할을 다시 강조한다.

「바람의 춤」은 한국적 資料因에 의한 한국 억양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메모에는 우리나라 전통가옥의 窓戶紙 문짝을 악기로 사용해 볼 계획이 남아 있는데(李海植, [海東新曲], p. 234에 「바람의 춤」의 작곡메모가 있다. 작곡가의 작곡메모는 음악사에도 남을 만킄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작품의 端草가 되고 작곡가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창호지 문살의 여러 가지 면적에 따르는 바람소리들을 이용해 볼 심산에서였다. 「바람의 춤」은 우리나라 전통가옥의 문살에 비치는 풍속적인 정취, 또는 문풍지 바람, 巫俗的인 강렬한 跳舞, 깊고도 담담한 풍류정신 등이 바탕이 된 작품이다. 풍류정신에 대하여는 일찍이 최치원선생의 글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본시 현묘한 풍류도(風流道)가 있는데, 이것은 초연하고 아량진 것이어서 서로 유불선(儒佛仙) 삼교의 진수를 다 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풍류란 속된 것에서 벗어나 멋스럽게 노는 것을 뜻한다(柳東植, [散花歌](서울, 正宇社, 1978), p. 124).

지금까지와 같은 생각과 의미 부여로 작곡한 「바람의 춤」 초연 비평은 아래와 같다.

 

「바람의 춤」 비평

한편 국악의 신곡 발표도 79년에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곡이 발표되고 실험적 정신이 시도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미래악회에서 발표된 李海植의 「風舞」와 黃秉冀의 「靈木」 등이 79년의 국악작품의 일면을 증언하는 곡으로 보인다. 신국악 작곡에는 한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을 필자는 의무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신국악의 작품들이 아직도 무엇인가 시도하려는 상태에 머물고 있는 느낌을 준다는 사실에 있는 것 같다. 이해식의 작품에서도 그 기법이나 형식이 어떠하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태도에서 시도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즉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추구했다는 느낌에 첨가해서 좋은 작품이란 생각까지는 이르지만, 이 벽을 뚫고 나아가 다시 누가 이런 소재로서 곡을 쓰려고 할 때 이해식의 작품을 공부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선에는 이르지 않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러한 영역이 있음에도 실험적이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그곳에 머문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여하간 국악의 작곡가 중 그는 중견작곡가로서 앞으로의 활동이 주목된다고 하겠다(서우석, “音樂,” (作曲 부문) [文藝年鑑](1979년도)(서울: 韓國文化藝術振興院, 1980), p. 242).

 

아래 인용은 「바람의 춤」 CD 해설이다. 녹음은 초연 연주자들 그대로이다.

 

「바람의 춤」 해설(CD)

1979년. 미래악회 제4회 작곡발표회 위촉작품.

나의 70년대 작품들은 내가 직접 수집한 토속민요을 작품의 소재로 자주 사용했는데 「바람의 춤」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작품의 소재는 전남 해남군 문래면 우수영리 사람들이 목화솜 타면서 부르는 <둥당애타령>과 논매면서 부르는 <절로소리>이다. 「바람의 춤」은 첫거리(prologue)․징굿․둥당애타령․뒷거리(epilogue)의 순서로 전개된다.

<첫거리>는 두 개의 단소로 시작된다. 제의적(祭儀的)인 <징굿>에서는 리듬이 음악의 동사(動詞)임을 잘 말해 준다. 셋째 부분인 <둥당애타령>에서는 언어가 종(種)의 특성임을 유희적으로 나타낸다. 또 유희가 음악의 직접적인 내용이자 활동임을 대합 껍데기․홀테․두부장수종․무당방울 등으로 강조한다.

소리나는 모든 것은 악기이다.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장난감이 흔치 않던 시절, 대합 껍데기에 구멍을 뚫어서 입으로 불면서 대합 껍데기의 진동소리를 즐겨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홀테는 지금은 농경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벼를 훑어내는 농기구이다. 이 홀테발을 금속으로 긁으면 마치 wind chime 비슷한 소리가 난다.

뒷거리에서는 <절로소리>를 피리가 애절한 독주로 시작하고 유희적인 언어를 매개로 하여 단소가 전조된 가락을 계속한다. <막장>(끝)은 다시 징의 동사적인 리듬으로 매듭 된다. 초연 때의 제목은 「풍무」였다(이해식 국악작곡집 CD 「바람과 춤터」 #8(서울: 예성음향 YSCD-008, 1999), 단소/김철호, vocal/김영동, 해금/송권준․양경숙, 피리/사재성, 타악기/백효숙․김재운, 지휘/김용만).

 

2. 무용음악 「갈숲」

 

부산현대무용단 위촉작품(제11회 대한민국 무용제). 안무/정귀인, 1989. 10. 20. 문예회관 대극장/서울.

 

「갈숲」 안무 노트

갈대

갈대밭

갈대숲

꽝꽝 언 얼음 밑에서 한 겨울을 보내고, 이윽고 파릇파릇 돋아나 오월 단오 때면 어느덧 키만큼 자라 파란 바다를 이루는 갈숲 갈숲은 지천에 널려 있었다.

살랑이는 미풍에도 마구 휘날리는 갈대 더 없이 끈끈한 생명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갈대.

온갖 철새의 보금자리로 여름 한철을 보내고, 이윽고 동네의 개구쟁이들에게 숨바꼭질 놀이터를 제공하는 가을의 갈대숲. 바람이라도 불면 한줄기 불면, 와삭와삭 부서지는 갈숲 그 정취.

지난날 도처에 지천으로 널려있던 갈대밭 그러나 지금은 이 갈숲이 부서지고 있다. 우리의 정취가 부서지고 있다. 우리의 향수가, 우리의 정감이 마구 부서진다. 너와 나의 고향이 망가진다. 마구, 마구, 마구...(정귀인).

 

무용음악 「갈숲」은 2~3분 정도의 짧은 곡들을 연결한 무용 조곡(dance suite)이다. 어린 시절 갈대숲을 헤집고 다니면서 갈대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갈대잎 부딪치는 소리에 마음을 조리던 잔잔한 추억을 이젠 빛 바랜 앨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무용음악 「갈숲」은 갈대의 시절을 오히려 세찬 바람처럼 놀이처럼 표현하고 있다. 다음은 현대무용 「갈숲」의 공연평이다.

 

「갈숲」 비평

釜山현대무용단의 정귀인은 여러 면에서 기대를 모아온 무용가였다. 그러나 이번 출연작인 갈숲은 의욕만 앞서고 졸속에 그친 감이 짙다. 더군다나 음악과 무용이 서로 어울리지 않아 음악이 무용의 창작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관되어야 하는가를 다시 한 번 절감케 했다(李盾烈, “대한민국 舞踊祭 中間評,” [東亞日報], 1989. 10. 25).

 

3. 18줄 가야고독주곡 「줄풀이 제2번」

 

제21회 서울음악제 위촉작품(작곡기간/1989. ?~1989. 9. 14). 가야고/지애리, 장고/김선옥, 1989. 11. 7. 문예회관 대극장/서울. 악보/?’89 서울음악제작품집?(서울: 한국음악협회, 1989), p. 259.

 

「줄풀이 제2번」 작곡노트

「줄풀이 제2번」의 변주의 정신적인 근원은 맺힘과 풀림의 교차이다. 즉 맺힘이 있어야 풀이가 있는 것이니 이것을 주제와 변주, 긴장과 이완, ethos와 pathos, 반사와 반반사, 어둠과 밝음, 혼돈과 질서 등의 여러 가지 순환형태와 이항 대립으로 바꾸어서 말할 수 있겠다(朴容淑, [構造的韓國思想論] 乙酉文庫 41(서울: 乙酉文化社, 1989), p. 18).

맺힘과 풀림은 우리들 삶의 본질적인 리듬이다. 한국인의 맺힘은 신명의 리듬으로 풀어지면서 창조와 생산의 의미로 이어진다. 이러한 생각들이 줄(絃)로써 풀어 가는 「줄풀이」의 작품배경을 이룬다(이해식).

 

서양음악의 주제와 변주를 순수한 우리말로 ‘맺힘과 풀림’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맺힘과 풀림은 영산회상이나 산조처럼 반드시 아주 느린 음악으로부터 점차 빨라지면서 변주되는 템포의 양상이 서양음악과의 차이이다. 또 서양음악은 정점(climax)을 향한 변주인데 이 정점이라는 게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맺힘이다. 그러니까 서양음악은 맺힘을 향한 변주여서 그들의 음악사는 갈수록 불협화음이 발달하는 역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서양음악의 종지는 강하고 힘차며 한국음악의 종지는 연기처럼 슬그머니 사라지는, 흔적이 소멸되는 종지이다(李海植, “동동(動動)의 구조,” [民族音樂學] 第19輯(서울: 서울大學校 音樂大學 附設 東洋音樂硏究所, 1997), p. 65 참조).

「줄풀이 제2번」은 원래 21현금 작품이었으나 초연 이후 18현금으로 수정하였다. 다음은 「줄풀이 제2번」 초연의 비평이다.

 

「줄풀이 제2번」 비평

많은 이야기들을 줄로서 풀어 가는 이야기를 한 이해식씨(위촉)의 실내악 2중주 <줄풀이 2번>을 들으면서 그답지 않은 서구와 국산 말투의 혼합어를 연출하는가 하면, 남의 말(중간부분)도 하고 있었다. 경음악용 같은 이야기였다. 그는 구성과 내부구조의 조직체가 더 단단해야겠고, 고급스러운 신선한 말투를 찾는 게 필요하겠다(김규현, “조무래기들의 음악잔치 서울음악제,” [음악저널](서울: 음악저널사, 1990. 1월호), pp. 130~131; 김규현, ?한국현대음악의 현장?(서울: 질그릇, 1992), p. 179).

 

「줄풀이 제2번」 해설(CD)

1989년 제21회 서울음악제 위촉작품.

「줄풀이 제2번」은 우리의 전통적인 맺힘(매듭)과 풀림(풀이)을 주제와 변주, 긴장과 이완, ethos와 pathos, 반사와 반반사, 어둠과 밝음, 혼돈과 질서 등의 이항대립과 순환형태로 대치하여 전개해 본 것이다.

맺힘과 풀림은 우리들 삶의 본질적인 리듬 週期이다. 한국인의 맺힘은 신바람의 리듬으로 풀어지면서 창조와 생산의 의미로 이어진다. 이러한 생각들이 줄(絃)로써 풀어 가는 「줄풀이」의 작품배경을 이룬다.

2악장은 전통적인 굿거리장단에 맞추는 hemiola rhythm으로 구성되어서 독특한 분위기의 흥을 자아낸다(이해식 국악작곡집 CD 「바람과 춤터」 #4. 가야고/이지영, 장고/박환영).

 

「줄풀이 제2번」 관련 논문

가. 李海植, “長短의 論理에서 創作으로,” [人文硏究] 第16輯(慶山: 嶺南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1994), pp. 515~517.

나. 李海植, “長短의 論理에서 適用으로,” [韓國音樂硏究] 第25輯(서울: 韓國國樂學會, 1997), pp. 269~271.

위의 논문 “長短의 論理에서 創作으로”의 악보를 정리하고 내용을 수정 보완한 것이 “長短의 論理에서 適用으로”이다. 이 논문 중에서 「줄풀이 제2번」 부분은 굿거리장단으로 된 2악장의 리듬 구조와 악센트를 논의하고 있다.

다. 김선림, “이해식 가야금 독주곡 「줄풀이 제2번」 연구,” 서울: 서울대학교 대학원 음악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1. 이 논문은 이해식의 작품과 그 배경을 개관하고 「줄풀이 제2번」의 선율의 변주구조와 리듬 전개를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4. 관현악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중앙국악관현악단 제7회 정기연주회 위촉작품(작곡기간/1990. 2. 8.~1990. 2. 21), 지휘/박범훈, 1990. 4. 30. 호암아트홀/서울. 악보/李海植, 국악관현악곡집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서울: 圖書出版 수문당, 1990), p. 209.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해설

내 작품의 준거가 되는 민요․굿․춤 등의 토속적 관습은 모두 바람으로 통한다. 우리나라의 산과 물을 동반하는 바람은 이미 나의 다른 작품들에서 자주 표상되어 왔으며 바람의 말도 그것들이 연속되는 결실의 하나이다.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은 나의 의식 속에서 세차게 불고 있는 바람이요 굽이쳐 흐르는 물이 작품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바람은 기상학적 의미 외에 굿-놀이, 춤-풀이에서 소용돌이치는 신바람처럼 한국인은 언제 어디서나 바람 속에서 산다. 그리고 여러 가지 함축된 정서를 자아낸다.

여기 「바람의 말」은 특별히 젊은이를 위한 언어이며 감각이요, 역동적인 몸짓이고자 하는 신선한 바람의 흐름이다. 동시에 국악의 속성이기 쉬운 보수적 태도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며 삶의 현실에 접근코자 하므로 그 작품성은 전통사회의 관습과는 많이 다르다(이해식).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신문

이해식씨(영남대교수)의 바람의 말은 국악의 디스코 음악화를 시도한 작품. 굿음악과 합창을 도입, 디스코무대에 내놓기 위해 이번에 선을 보인다. 가벼운 터치에 경쾌한 맛이 있다는 것이 李씨의 설명(李啓弘기자, “國樂器로 디스코 선율,” [東亞日報], 1990. 4. 29).

 

위의 신문기사는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초연 직전에 기자가 추측 기사를 쓴 것이지 작곡자가 사전에 기자를 만난 적은 없다. 그리고 이 작품은 합창이 편성되어 있지 않다. 나는 지금까지도 「바람의 말」이 디스코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래도 듣는 사람들이 이 작품을 디스코라고 인식함은 작품이 그만큼 활달한 젊은이 취향으로 보임이어서 작곡의도에 맞는다. 다음은 「바람의 말」 寸評이다.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촌평

응집력은 약했으나 다채로운 악기들이 발랄한 대화로 재미를 더해 준 이해식의 바람의 말(韓明熙, “메마른 가슴 적셔준 國樂무대,” [東亞日報], 1990. 5. 2).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이 탈고될 때까지.

나는 한국인의 민속적 심성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風水地理에 접근하면서 바람과 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李海植, “작품 후경층의 민속성,” [예술평론] 제4호(대구: 대구예술평론가협회, 1993), pp. 215~216). 「바람의 말」의 모티브가 되는 바람은 전통적인 풍수지리에서 끌어낸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초점을 젊은이와 현대의 시제(時制 tense)에 맞추었을 뿐, 바람이라는 모티브와 민속이라는 배경 말고는 풍수지리와 거리가 있다. 어쨌든 바람은 내가 존재하고 또 작품을 쓰는 원동력이다. 여기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은 기대되는 젊은이의 미래를 위한 축전서곡이다.

내가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사람의 稟性으로 읽은 바람은 1979년 「바람의 춤」 등에서 이미 表象되어 왔다. 그후로 1990년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을 쓰기 전에 나는 우리나라의 風水地理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風水地理說은 우리 民族의 基層的 思想体系를 이루어 온 사상의 하나로, 그 내용의 聖俗이나 眞假를 막론하고 新羅 以後의 歷史上 우리 民族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觀念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崔昌祚, [韓國의 風水思想](서울: 民音社, 1984, 2판), p. 11).

圖讖과 관계된 풍수관은 크게 陰과 陽의 조화다. 책 한 권 읽고 풍수와 음양이 어쩌니 저쩌니 할 처지는 이르지만 陰陽의 氣는 내 뿜으면 바람이 되고 오르면 구름이 되고, 분노하면 우뢰가 되며 떨어지면 비가 되고 땅속을 흘러 다닐 때는 生氣가 된다(夫陰陽之氣 噫而爲風 升而爲雲 奮而爲雷 降而爲雨 行乎地中 而爲生氣)...崔昌祚, [韓國의 風水思想], p. 34)는 풍수이론은 비단 葬法 뿐만 아니라 이를 작곡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나의 풍수에 관한 관심은 어렸을 적에 시골 어른들에게서 들은 기억과 덜구소리 가사이다. 즉 “山之祖宗은 崑崙山이요 水之祖宗은 黃河水라,” “左靑龍 右白虎”는 풍수지리와 직접 관계된 성어(成語)들이다.

작품 「바람의 말」을 설명하면서 이처럼 긴 잔소리를 늘어놓음은 「바람의 말」이란 曲名을 풍수에서 얻었기 때문이다. 풍수는 바람과 물의 조화다. 바람과 물이 사는 곳은 山이다. 산에 관련된 나의 작품으로 「산굿」(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제26회 국악정기연주회 위촉작품. 지휘/이성천, 1984. 10. 26. 국립극장 소극장/서울)이 있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라는 시간의 contrast처럼 음과 양, 바람과 물은 멋진 contrast다. 이처럼 내 작품의 contrast는 동양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예로부터 있어온 국악이라는 산에 새롭게 흐르는 작품세계를 담음이 나의 작업이다. 동양적 사고 속에 현대적 감각이 두드러지게 함이 나의 작품정신이다. 그래서 「바람의 말」 앞에 ‘젊은이를 위한 춤’이란 말이 붙는다. 춤은 진정한 자유요 진정한 자유는 자아의 감각이 소멸되는 엑스타시(ecstasy)의 경지에 접어들어서 춤추는 사람의 내면에 靈魂이라는 또 다른 자아가 생성되는 상태이다. 춤추는 젊은이의 영혼은 山谷을 돌아드는 바람과 물처럼 얼마나 싱그러운가? 그것이 곧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이다. 보이지 않는 바람은 보이지 않는 靈魂의 messenger이다. 중앙 국악관현악단의 참신한 초연은 그날 호암아트홀에 모였던 젊은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나머지 여러 젊은이들의 요청으로 작곡한 것이 「바람의 말 제2번」(제10회 대한민국국악제 위촉작품. 초연/대구시립국악관현악단, 지휘/장명화, 1990. 9. 11. 문화예술회관/대구)이다.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해설(LP)

우리나라의 민속에 젖은 나의 성장과정과 KBS-Radio에서 producer로 일했던 10년 동안의€fieldwork은 일생동안 내 작품의 배경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여기에 작품을 쓰기 위한 끊임없는 思惟와 변환을 위한 줄기찬 노력은 나의 작품을 국악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한지 오래다. 그 본보기가 곧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이다.

모든 인간사는 작품의 ‘꺼리(material)’가 되며 그것을 바람으로 보기 시작한 후부터 나의 작품 스타일이나 인생관도 바람에 씻기듯 세련되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국악도 창작을 통하여 바람맞이의 변화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쓴 곡이, 또 특별히 젊은이의 감각을 의식하고 쓴 작품이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이다.

이 작품은 중앙국악관현악단의 제7회 정기연주회의 위촉 및 연주실황이다. 또 同名으로 출판된 나의 작풉집에 score가 수록되어 있으며, 역시 同名의 음악으로 鄭貴仁교수가 안무한 부산현대무용단의 춤이 제1회 대구무용제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1991. 6. 24. 종합문화예술회관 대극장/대구)(李海植 創作曲集 LP 「바람과 여자」 side A #2, 서울: 서울음반 SRB-019, 1992).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해설

바람은 내 작품의 경전이며 변덕스런 사랑의 대상 같은 것이다. 바람은 나의 작품에서 비어있음의 상징이며 동시에 무엇이 꽉 차여있는 질량 같은 것이다.

나는 항상 국악이 현대인의, 특히 젊은이의 음악적 정보 욕구에 충족되도록 변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주장으로 탈고된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은 전통사회의 관습과는 거리가 있음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근저엔 국악의 기류와 종교적인 암시가 흐름을 부인할 수 없다.

나의 작품에서 종교적인 암시란 내 마음의 상태이다. 나의 심상이 바람으로 포화되고 바람 앞에서 벌거벗은 상태일 때 그것은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처럼 격정과 해탈의 춤으로 전이된다. 1990년 작품(영남대학교 음악대학 제14회 국악정기연주회 해설. 지휘/최문진, 1995. 6. 2. 시민회관 대강당/대구).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해설

바람은 정숙하면서도(靜) 변덕스러우며(動) 비어 있으면서도(空) 꽉 차여 있는(滿) 자연의 리듬(律)이다. 리듬은 엄청난 융통성을 가진 언어이다. 춤이란 아름다움과 역동성을 함께 가진 심층적이면서도 바람과 같은 움직임이다. 움직임이란 원래 그 스스로가 미학적이고 정서적인 개념을 한 개인의 의식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전이(轉移) 시키기 위한 매체인 것이다(John Martin/金泰源 譯, [현대춤의 인식](서울: 현대미학사, 1993), p. 39)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은 국악으로도 충분히 젊은이의 감각에 맞는 언어와 움직임의 굿을 벌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쓴 작품이다.

나는 바람을 제의(祭儀, 굿)로 파악하여 자주 내 작품의 정신적인 근거로 삼는다.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은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한 제의이다. 나의 작품에서 ‘바람’이란 말은 요즘 전세계적으로 회자되는 벤처(venture)라는 말처럼 미래 지향적인 의미와도 관련된다.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은 바람처럼 항상 생동하고 성장하는 장차의 젊은이를 표상한다. 1990년 작품(대전시립연정국악연구원 제6회 정기연주회 해설. 지휘/지원석, 2000. 5. 31. 대전시민회관 대극장/대전).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관련 논문

가. 공우영, “韓國 創作音樂의 짜임새,” ?韓國音樂硏究? 第22輯(서울: 韓國國樂學會, 1994), pp. 79~80.

나. 尹昭喜, “토속적 idiom과 동양정신을 반영한 음악­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국악창작곡분석?(서울: 도서출판 어울림, 1999), pp. 135~153. 尹昭喜의 논문은 작곡자의 면모를 fieldwork․토속(idiom)․춤․바람․굿․Homo Ludens(인간의 놀이)․후경과 전경․음의 논리․박의 논리․현대음악화․아방가르(Avantgard)로 세세하게 나누고 작품개요에 이어서 분석․세부 섹션과 진행․미시분석․맺는 말 등으로 아주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다. 정승은, “창작국악 작품의 교재화를 위한 작품 선정 및 학년별 단계짓기 연구,” (청주: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0), pp. 55~65. 정승은의 논문은 학생들이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을 감상함으로써, 국악으로 새롭게 구성한 다양한 리듬 패턴을 경험하게 하며, 이를 통해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하고, 동․서 악기가 다양하게 빚어내는 울림을 경험하게 할 의도로 이 작품을 선정한 까닭을 밝히고 있다. 또 이 작품은 제7차 음악과 교육과정에 서술된 9학년의 감상 지도 내용과 일치한다고 보고, 감상․학습․학년 단계는 9학년 이상으로 설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5. 화현(和絃) 거문고독주곡 「고풀이(琴解)」

 

任田琴會 창단연주회 위촉작품(작곡기간/1991. 2. 5.~1991. 2. 10). 화현금/이재화, 장고/강호중, 1998. 10. 15. 국립국악원 우면당/서울.

 

「고풀이」 해설

천년을 넘어오는 거문고 소리! 이에 조용하면서도 깊은 변화가 일고 있으니 곧 화현금의 출현이다.

일단 화현금은 거문고의 본질적인 소리를 그대로 두었다는 것에 안도한다. 그러면서도 추가된 화현과 유현의 기능적인 조화는 전통음악뿐만 아니라 현대의 창작국악을 연주하는 데에도 충만한 기대를 갖게 한다. 새로운 악기는 새로운 작품을 요구한다.

제목 「고풀이」는 ‘고(琴)를 풀어간다’는 뜻이며, 동일한 발음으로 씻김굿 중에서 ‘고(固)풀이’의 뜻과 함께 변주와 전개를 뜻하는 거문고를 위한 解彈이란 多義를 가진다.

나의 작품에는 Lydian mode와 같이 제4음이 반음 올려진 선법이 즐겨 사용된다. 이것은 5음음계 밖의 소리로서 매우 특징 있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음조직은 「고풀이」에도 적용되었다.

1악장♩=ca. 96~100

2악장♪=ca. 138, 굿거리풍으로

1991년 2월에 탈고된 임전금회 위촉작품(이해식).

 

「고풀이」를 초연한 연주자의 말

연주자에게 있어서 특히 창작곡은 낯선 세상으로의 여행이다. 이 여행은 일상적일 수도 있고 탐험적일 수도 있다.

왼손은 세 줄의 선율현 위를 마지막 괘까지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오른손은 일곱 줄 위를 분주하게 오르내리면서 장구와 함께 펼치는 리듬과 선율의 향연은 가히 탐험에 가까운 여행이었다. 독특한 어법으로 화현과 기존 현의 조화를 통하여 거문고음악의 세계를 열어준 작곡자께 감사를 드린다(이재화).

 

「고풀이」 비평

10월 15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이번 연주회에서는 이해식 작곡의 화현거문고 독주곡 「고풀이(琴解)」를 이재화가 초연했다. 이 작품은 기존의 작곡가의 작품이 대개 그랬던 것처럼, 리듬의 변화를 최대한 살려 보려 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기존의 거문고 또는 화현거문고를 위한 테크닉의 계발에 도움이 되는 작품이라고 생각되기 힘들었다. 이해식 특유의 음악적 특성은 십분 살아있었지만, 거문고의 악기적 특성은 무시 내지 간과되었다는 뜻이다. 대체적으로 그가 만들어내는 음진행들은 우리 악기로는 피리와 같은 것이 어울리는데, 거문고라는 악기에서는 그 선율들이 생명감 있게 살아나기 무척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거문고를 지나치게 ‘타악기’적인 시각으로 대하는 작곡가의 시각에서 문제 내지 한계가 발견된다. 작곡가가 그 동안 무수히 많이 시도했던 변화되는 리듬을 통해서 음악적 황홀감을 경험하고자 하는 태도도 이제는 식상감이 느껴진다. 작곡가 특유의 ‘굿’과 ‘춤’의 논리를 거문고에 대입해 보는 것은 이미 ‘술대굿’ 등으로 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럼에도 그가 거문고를 통해 또 한판의 멋진 리듬놀이를 전개하려면, 거문고와 자연스러운 연주법에서 자연스럽게 배태되는 강약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소 추상적인 표현이었으나, 우리 악기 가운데서 거문고만큼 ‘자존심 강한’ 악기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북한에서 거문고 개량에 실패한 것도, 거문고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성격이 무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악기를 통해 능숙한 솜씨를 발휘했던 이해식의 음악적 특성이 거문고를 통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은, 자존심 강한 거문고라는 악기의 생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진정 거문고를 위한 출중한 작품을 쓰려는 작곡가라면, 작곡가 개인의 음악적 논리나 감성 등을 무리하게 대입하기 이전에 거문고 특유의 생리와 특성에 대한 근본적인 고구(考究)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윤중강, “자존심 강한 악기 거문고의 자존심 세우기,” [문화예술](서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98. 11월호), pp. 81~82).

 

6. 論外: 인터넷 게시판 -1ㆍ2-

 

다음에 소개하는 인터넷 게시판은 論外이다. <게시판 1>은 <득음>이란 가명으로 <가야금앙상블 사계> 자유게시판에, <게시판 2>는 <저승사자>란 익명으로 국립국악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득음과 저승사자가 같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게시판 1에서 앞뒤의 <사계> 관련만 제외하면 게시판 2와 동일한 내용이다. 실명을 감추고 IP주소 211.33.179.139' of 211.33.179.139'로 2000년 5월과 11월에 올린 이들 두 개의 게시판은 문장의 단락․철자법․띄어쓰기 등의 過謬를 그대로 퍼왔다.

 

-게시판 1- (www.sagye.com)

가야금앙상블 사계... 자유게시판

이 름 득음 날 짜 2000/05/04 (23:46:06)

홈페이지 번 호 50 조 회 34

제 목 이해식음악의 정체성

이해식은 사계와 밀접한 작곡가이다

그리고 그는 국악작곡가 중에 그래도 서양음악에 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작곡가이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그의 서양음악 정보는 함량부족인것 같고 아무튼 그의 서양음악에 대한 자부심은 상당하다.

그의 작품은 상당히 다양한듯 하지만 실은 상당히 단순하고 고정된 스타일의

반복이다

구체적으로 그의 악곡 구성 방식 사용되는 음계 장단의 전개 방식 음조직의 짜임새는 자신의 작품이 안정기를 갖은 후 상당히 오랫 동안 변하고 있지 않다.

아무튼 이건 나의 사족이라 치고 우선 그의 음악의 중요한점은 무감동하다는 점과 민속음악 특히 굿과 토속민요의 사용에 있어 상당히 미숙하다는 점이다.

그는 항상 장황한 서론을 좋아한다

이 점은 그의 창작 노트에 나타나는데 그는 3일정도 창작을 위한 변에 소모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들리는 그의 음악은 굿과 토속민요의 가락이 분해 용해되어

정체성을 알 수 없게 된다. 물론 알 수 없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이 매우 어설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작품을 보면 토속민요를 과학적으로 채보해 봤는지 굿음악을 채보 분석해 봤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미개한 기보법과 애매함으로

가득차 있다.

여기서 나는 이해식의 음악을 비판하고자 하는것이 아니다.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바라본 순수한 음악 애호가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의 음악적 특징은 남다를 구성력에 있다

확실히 그는 일반적인 국악작곡가들 보다 구성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그의 구성력은 국악기의 한계로 가차없이 무너지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는지 알고 싶다

그의 음악은 클러스터적음향을 애용하고 있다

이는 내가 보건데 정확히 말해 서양 현대음악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시작된 그의 음의 유희일뿐 전혀 효과가 없고 그의 음악을 짜중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폴리포닉성 또한 우리의 시나위와의 연관성이 아닌 서양음악에대한 그의 동경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 나타난는 장단은 내 소견으로는 정말 유치하다

그의 장당은 생명력을 상실해 있고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도 없다

그의 장단의 그의 상상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고 실재 존재하는 우리의 우구한 장단의 역사와는 무관한듯 하다.

그러한 나의 지적은 그에 대한 음해성 발언이 절대 아니다

10년 이상 그의 작품을 들으면서 그낀 나의 솔찍한 그의 음악에 대한 감상문이다

아무튼 사계와 이해식의 만남 재미있을것 같다.

그와 작업이 서양음악과 관련이 된 만남이든 아니든 간에 그의 음악은

좋은 결과를 갖기 바란다

우선 사계는 그의 음악을 더 공부하고 비판 수용함으로써 더 창조적인 만남이 되어 가기를 바란다.

(c) 2000, Chollian Internet

 

-게시판 2- (www.ncktpa.go.kr)

2000/11/27 (17:23) from 211.33.179.139' of 211.33.179.139' Article Number : 765

저승사자 Access : 94 , Lines : 46

이해식의 음악 -그를 비판함.

그는 국악작곡가 중에 그래도 서양음악에 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작곡가이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그의 서양음악 정보는 함량부족인것 같은데... 아무튼 그의 서양음악에 대한 자부심은 상당하다.

그의 작품은 상당히 다양한듯 하지만 실은 상당히 단순하고 고정된 스타일의

반복이다

구체적으로 그의 악곡 구성 방식 사용되는 음계 장단의 전개 방식 음조직의 짜임새는 자신의 작품이 안정기를 갖은 후 상당히 오랫 동안 변하고 있지 않다.

아무튼 이건 나의 사족이라 치고 우선 그의 음악의 중요한점은 무감동하다는 점과 민속음악 특히 굿과 토속민요의 사용에 있어 상당히 미숙하다는 점이다.

그는 항상 장황한 서론을 좋아한다

이 점은 그의 창작 노트에 나타나는데 그는 3일정도 창작을 위한 변에 소모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들리는 그의 음악은 굿과 토속민요의 가락이 분해 용해되어

정체성을 알 수 없게 된다.

물론 알 수 없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방식이 매우 어설프다는 사실.

그의 작품을 보면 토속민요를 과학적으로 채보해 봤는지 굿음악을 채보 분석해 봤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미개한 기보법과 애매함으로

가득차 있다.

그의 음악적 특징은 남다를 구성력에 있다

확실히 그는 일반적인 국악작곡가들 보다 구성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그의 구성력은 국악기의 한계로 가차없이 무너지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는지 알고 싶다

그의 음악은 클러스터적음향을 애용하고 있다

이는 내가 보건데 정확히 말해 서양 현대음악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시작된 그의 음의 유희일뿐 전혀 효과가 없고 그의 음악을 짜중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폴리포닉성 또한 우리의 시나위와의 연관성이 아닌 서양음악에대한 그의 동경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 나타난는 장단은 내 소견으로는 정말 유치하다

그의 장당은 생명력을 상실해 있고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도 없다

그의 장단의 그의 상상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고 실재 존재하는 우리의 우구한 장단의 역사와는 무관한듯 하다.

그러한 나의 지적은 그에 대한 음해성 발언이 절대 아니다

10년 이상 그의 작품을 들으면서 그낀 나의 솔찍한 그의 음악에 대한 감상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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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끝말: 12현금 독주곡 「흙담」

 

음악은 연극과 같아서 연주되기 전에는 글자로 쓰여진 채로 그저 잠자는 희곡이나 대본(libretto)과 마찬가지다. 연극배우나 음악연주자는 이들 잠자는 희곡이나 악보에 역동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 제2의 창조자요 해석자이다. 희곡이나 악보는 연출자(감독)와 지휘자(연주자)의 해석에 따라서 무대가 달라진다. 청중이나 비평자는 먼저 이들 연기자와 연주자의 연기와 연주를 보고 듣고 비평한다. 이때 연주자나 연기자가 어떤 여건에 놓여 있는가는 관중이나 청중에겐 별개의 문제이다.

농경민족에게는 주술적인 풍농기원과 관련하여 둥근 타악기가 발달하였다. 또 타악기를 두들기는 것은―농경 타악기는 연주라기보다는 두들긴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된 농사 노동의 피로를 덜게 하고 집단 노동의 효율을 올리는 역할도 한다. 이러한 농경의 타악적인 관습은 창작국악에도 그대로 도입되어서 그 두들김의 음량은 관현악을 압도해 버린다. 이런 현상은 연주자나 청중이 분별되지 않은 카타르시스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이것은 아직도 우리나라의 창작국악의 수준이 농경시대의 구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라고 본다.

17세기 유럽의 음악에서 시끄러운 표현은 세속적인 불쾌한 일에 해당하며 본래의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연하고 조화가 잡힌 울림은 <비평>시대 초기에서는 아직 손색없는 생활의 꿈과 같은 상태나 천상(天上)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다. 울림에 있어서의 <추함>은 기예(‘저열한’ 관습)이며, 찰나적인 쾌락이며, 악마적인 것의 화신이었다(J. Marston, Antonio and Mellida, Ⅱ(1602), in: The Works, ed. A. H. Bullen(1887), Ⅰ, Hildesheim 1970, 175. Werner Braun/대학음악저작연구회 역), “판단,” [음악비평], p. 121에서 재인용).

내 작품에서 타악기의 음향은 농경시대의 시끄러운 관습과는 다르다. 타악기는 다른 악기군과의 정확한 균형을 이루도록 작곡되었으므로 지휘자는 보다 면밀하게 스코아를 검토해야 한다. 왜냐 하면 남이 나의 작품을 들을 때에는 오로지 연주만을 보기 때문이다.

“끝말”에서 논의될 비평은 1969년에 발표한 12현금 독주곡 「흙담」(문화공보부 문예창작공모 국악작곡 당선작(작곡기간/1969. ?~1969. 2. 2), 1969. 7. 21./서울. 초연/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제10회 국악정기연주회. 가야고/심영인, 장고/金正秀, 1969. 11. 4. 명동 국립극장/서울. 악보/李海植流 國樂器獨奏를 위한 創作曲集 [흙담](慶山: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p. 36)이다. 이 작품을 “중간”(본론)이 아닌 “끝말”에서 논의함은 외국인의 비평에 중대한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흙담」과 관련된 기록을 소개하는 것이 순서이겠다.

 

「흙담」의 배경에 관하여

「흙담」의 배경은 볏짚으로 엮어서 시골의 지붕이나 흙담 위에 얹은 <용마름>이다. 용마름이란 초가(草家)의 용마루(屋脊)나 토담(흙담)을 덮은 짚으로, 가운데가 등성이지게 길게 엮은 이엉을 말하는데 용마람(강원․전남), 용마라미(경북) 등의 사투리가 있다(이희승, [국어대사전](서울: 민중서림, 1981, 32刷), pp. 2685~2686).

용마름은 정성으로 촘촘히 엮기 때문에 볏짚이 웬만큼 썩어도 빗물이 새지 않으며, 새 짚으로 엮은 용마루를 얹은 초가의 아름다운 곡선과 색깔이야말로 순수한 한국적인 정경인데 지금 이러한 모습은 새마을 운동과 함께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용마름은 용의 형상과 비슷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며, 이 용마름에 線으로 길게 형용되어진 용의 생동적이고 약동적인 이미지가 「흙담」의 構想素이다.

흙담은 넓은 널빤지를 양쪽으로 가로 세워 놓고 그 사이에 잘게 썰은 볏짚을 섞은 흙을 한층 한층씩 다지고 쌓아 올린 다음 ―이런 일을 “담을 친다”고 한다― 용마름을 얹는다. 나는 어렸을 적에 나의 큰 형님과 이런 흙담을 쌓아본 경험이 있다.

가야고독주곡 「흙담」은 대학 졸업 직전에 도봉산 밑에 살면서 썼는데 탈고한 날짜가 1969년 2월 2일이며, 아주 짧은 기간에 완성한 것으로 기억된다. 아래 인용은 「흙담」 해설이다.

 

남도음악의 분방함과 agogic을 염두에 두고 왼손의 농현과 오른손의 technique를 구사시키려 했다. 形式이나 이론 같은 건 意識의 彼岸에 두고...(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제10회 국악정기연주회 초연 해설).

 

위 해설에서 밝힌 남도음악이란 <산조>를 말하며, 가야고 주법의 새로운 테크닉을 추구함이 작곡 당시의 생각이었다. 장고는 가야고와 대등하게 2중주를 이루는 아주 섬세한 리듬으로 전개된다. 또 形式이나 理論같은 건 생각 밖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지극히 형식적인 작품이 되었다. 작곡 당시에 어떤 구애 없이 수필처럼 자유스럽게 전개하려는 생각에서 그런 뜻을 밝혔던 기억이 난다.

「흙담」은 원래 세 개의 section이 연결된 단악장이었으나 후에 3악장으로 분리하면서 반복되는 부분을 생략하고 리듬과 농현을 수정하면서 해설도 아래와 같이 다시 썼다.

 

「흙담」 해설

1969년 작품.

지금은 보기 어려운 양지바른 시골집 흙담 위에 얹어진 용마루로부터 한국인의 담담한 정취와 순박한 정서를 표현한 작품이다.

형식은 세 개의 章으로 나누었고€가야금의 운지법에 특수연주법을 구사해 보았다. 곡의 연주와 해석에 연주자의 기량이 요구된다(朴貞姬 가야금독주회 해설. 장고/박문규, 1980. 12. 19. 명동 유네스코회관(11층) 연주장/서울).

 

그러나 동명의 李海植流 國樂器獨奏를 위한 創作曲集 ?흙담?, p. 36에 수록한 악보는 생략된 부분을 草稿대로 복원하고 리듬은 수정한대로 그냥 두었다.

다음은 Alan C. Heyman이 KOREA TIMES에 기고한 「흙담」의 비평과 그 밖의 촌평들이다. Heyman은 곡목 「흙담」을 <돌담>Stone Wall)’으로 誤譯하고 있다.

 

「흙담」 비평

A composition for solo kayageum (a twelve-stringed instrument) accompanied by a chango (hourglass-shaped drum) entitled “Stone Wall” by Lee Hae-sik followed. This work, which made frequent use of two-note chords and employed a variety of rhythmic patterns, revealed an admirable technique on the part of the performer, Miss Shim Young-in, but all-in-all is not a terribly interesting piece(Alan C. Heyman, “Land of the Dead,” Tops SNU Concert, KOREA TIMES, 1969. 11. 9.).

 

復古的인 바탕을 굳게 하는 ...李海植의 「흙담」은 古典技法의 自己調和가 퍽 슬기롭게 처리되고 있으며 가야금 獨奏의 새 경지를 닦은 作品이다...(李相萬, “10회 國樂定期公演,” [주간한국](서울: 한국일보사), 1969. 11. 9)

전통의 반추에 과감한 李海植의 독주곡 「흙담」은 감흥이 바탕이 된 좋은 작품이다(李相萬, “현대 악단에 높이 든 깃발,” [서울신문], 1969. 11. 13).

 

「흙담」 해설(LP)

가야고독주곡 「흙담」은 지금은 보기 어려운 시골집 흙담 위에 얹어진 용마름에 배어있는 한국인의 담담한 정취와 소박한 정서를 표현한 작품이다.

용마름이란 초가의 용마루나 토담(흙담)을 덮은 가운데가 등성이지게 볏짚으로 촘촘히 엮은 이엉을 말한다.

용마름은 용의 형상과 비슷해서 생긴 이름이며 용의 생동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와 볏짚이 정제된 용마름의 짜임새에서 이 작품의 구상소를 얻은 것이다. 가야고의 연주기량이 요구되는 곡이다(이해식).

Clay wall(1969)

This piece expresses the simple emotions of the Korean people in the form of Yongmarum, the covering of a roof rides or mud wall which is scarcely seen nowadays. Yongmarum is made from densely-knit rice stalks and covers the clay wall or roof of houses in the Korean countryside.

Yongmarum takes its name from its dragon-like appearance(“Yong” means dragon). This piece conjures up the image of lively dragons gained from the compact beauty of Yongmarum the utmost technique is required to play this piece well.

Composed by Hae Sik Lee(Professor, College of Music, Yongnam University)(번역/장병길. 閔美蘭, LP「伽倻琴音樂史選曲展」Ⅰ(1960年代)(서울: 지구레코드-JLS 12024 74, 1992), side B #1, 장고/박문규).

 

「흙담」 해설(LP)

가야고독주곡 「흙담」은 1969년 2월경 친구가 내어 준 도봉산 밑의 시멘트 블록방에서 짧은 기간에 쓰여진 작품이다.

가야고의 연주기량을 최대로 확대해 보자는 것이 작곡 당시의 의도였다. 이 작품이 문화공보부의 문예창작공모에 당선되고(1969. 7. 21), 서울대학교 제10회 국악정기연주회에서 초연된(1969. 11. 4) 이후 어려운 곡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초연 후에 몇 번 악보가 수정되었으나 결국은 초연 때의 악보로 되돌아갔다.

제목 「흙담」은 지금은 보기 어려운 농가의 지붕이나 흙담 위에 얹어진 용마름의 형상을 악곡으로 표현해서 지어진 것이다.

거친 볏짚으로 엮어 올린 용마름의 역동성은 하늘로 치솟는 듯한 용을 닮은 한국인의 힘찬 기상이다. 또한 그 갸름한 엮음새는 한국인의 담담한 정서를 담고 있다.

가야고 작품 「흙담」은 용마름 자락에 베어 있는 전통의 짙은 흙내음을 오늘의 감각으로 바꾸어 놓은 나의 대표작이다. 同名으로 출판된 나의 작품집에 악보가 들어 있다.

여기서 감사의 뜻으로 1991년 가을 비 내리는 늦은 밤까지 「흙담」과 「줄풀이」의 연주자들을 지도해 준 서울대 음대 李在淑교수의 아낌없는 열성을 기록한다. 그리고 이 음반이 순조롭게 출반되는 데는 KBS-FM 여러분의 도움이 컸음에 감사 드린다(李海植 創作曲集 LP 「바람과 여자」 side B #1․#2, 가야고/이지영, 장고/김선옥).

 

「흙담」 관련 논문

홍미나, “이해식류 가야고산조 ‘흙담’의 연주법에 관한 연구,” 용인: 용인대학교 예술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9. 이 논문은 「흙담」에서 구사되는 가야고의 특수한 연주법을 간결하게 여섯 가지로 분류해 놓았다.

 

지금까지 전개한 가야고독주곡 「흙담」과 관련한 기록 중에서 惟獨한 관심은 Alan C. Heyman이 「흙담」을 <돌담>으로 誤譯한 비평이다. 이 비평은 흙과 돌의 본질적인(radical) 울림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비평자로서의 통찰력이 문제된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번역’이 ‘반역’이 된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칭찬할 때 <그가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음악 비평가는 통찰력을 가지고 누구보다도 음악을 들을 줄 아는 전문가이다. 통찰력을 가지고 듣는다는 것은 흘러나오는 소리에 우리의 주의력을 모으고, 그들이 형성하는 음형(音型)을 관찰하며, 거기로부터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의 끊임없는 흐름에 호응하는 일이다(Joseph Machlis(辛錦善 譯), [음악의 즐거움](상)(서울: 梨花女子大學校 出版部 이화문고 12, 1982), p. 3). 「흙담」은 앞의 閔美蘭의 「伽倻琴音樂史選曲展」 LP 해설에서는 분명하게 ‘Clay Wall(흙담)’로 번역하고 있다.

또 흙과 돌의 본질적인(radical) 울림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한 나라의 국어에서 다른 나라의 국어로의 번역이 가장 불가능한 것이 음과 울림의 현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한 국어의 소리의 공간은 그 독자적인 울림을 가지고 있다[Gaston Bachelard(閔憙植 譯), [초의 불꽃] 外(서울: 三省出版社 世界思想全集 16, 1985), p. 144].

일반적인 언어 사용법에서 보면 ‘비평하는 Kritizieren’ 일은 ‘트집을 잡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도 곁들여 ‘흠을 잡는’ 일과 마찬가지로 쓰이고 있다(Werner Braun/대학음악저작연구회 역, [음악비평], p. 106). 나의 「줄풀이 제2번」이 연주된 <제21회 서울음악제>는 “조무래기들의 음악잔치”라고 싸잡은 평을 들었다(김규현). ‘조무래기’란 자질구레한 물건이나 어린애들을 이르는 말인데, 21회나 거듭되는 음악제를 ‘조무래기들의 잔치’라고 폄하한 비평 제목에 품격을 부여하기는 어려울 거 같다.

연주회를 들으러 가는 사람은 비평가에게 편견 없는 가치 판단을 기대한다(Werner Braun/대학음악저작연구회 역, [음악비평], p. 106).

나의 18현금독주곡 「줄풀이 제2번」이 초연된 1989년도의 <서울음악제>는 벌써 제21회였으니 지금도 계속되는 이 음악제의 역사가 그 당시로서도 오래된 연륜이었다. 비평가는 이 음악제가 陰으로 陽으로 한국 음악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인정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발견하는 넓은 혜안을 가져야 할 것이다. 조기에 재능을 발견한다는 것은 소질 있는 비평가의 특징이다(Werner Braun/대학음악저작연구회 역, “비평하는 일,” [음악비평], p. 106). 또 批評家는 文章으로 써서 表現하는 사람이므로 확실히 魅力的인 言語形成力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野村良雄/李成千 譯, [音樂美學](서울: 音樂藝術社, 1974), p. 133).

「줄풀이 제2번」의 비평은 “고급스러운 신선한 말투를 찾는 게 필요하겠다”로 끝맺는데 이 말은 서울음악제 전체를 ‘조무래기’라고 비하한 비평과는 상치된다고 본다. 진실한 비평가는 모름지기 격조 있는 문장가요 덕망을 갖춘 문필가여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최고선이라고 주장하면서 탁월성에 따른 활동에서 행복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신득렬, “행복과 교육,” [敎育哲學] 제18집, p. 198). 어떻게 탁월하게 작곡할 수 있는가? 능동적인 연주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작품을 通觀하는 지적 비평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진실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지평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나의 곡조 짓기(作曲)와 글짓기(作文)는 오직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이다.

“남이 나의 작품을 어떻게 보는가?”라는 명제가 부디 춤과 음악으로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이 논문을 쓴 보람이겠다.

 

 

참고 문헌

 

단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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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容淑, [構造的韓國思想論] 乙酉文庫 41, 서울: 乙酉文化社, 1989.

柳東植, [散花歌], 서울, 正宇社,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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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

野村良雄/李成千 譯, [音樂美學], 서울: 音樂藝術社, 1974.

Gaston Bachelard/閔憙植 譯, [초의 불꽃] 外, 서울: 三省出版社 世界思想全集 16,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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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용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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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신득렬, “행복과 교육,” [敎育哲學] 제18집(대구: 한국교육철학회, 2000), pp. 191~208.

李海植, “작품 후경층의 민속성,” [예술평론] 제4호(대구: 예술평론가협회, 1993), pp. 201~228.

李海植, “작품에서 색깔 있는 움직임,” 1994년 국악의 해 학술회의 [2000년대를 향한 한국창작음악의 회고와 전망](서울: 한국국악학회․국악의 해 조직위원회), pp. 107~135.

李海植, “동동(動動)의 구조,” [民族音樂學] 第19輯(서울: 서울大學校 音樂大學 附設 東洋音樂硏究所, 1997), pp. 49~95.

 

나의 작품과 관련된 논문

공우영, “韓國 創作音樂의 짜임새,” [韓國音樂硏究] 第22輯(서울: 韓國國樂學會, 1994), pp. 74~93.

尹昭喜, “토속적 idiom과 동양정신을 반영한 음악­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국악창작곡분석](서울: 도서출판 어울림, 1999), pp. 135~153.

李海植, “長短의 論理에서 創作으로,” [人文硏究] 第16輯(慶山: 嶺南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1994), pp. 477~528.

李海植, “長短의 論理에서 適用으로,” [韓國音樂硏究] 第25輯(서울: 韓國國樂學會, 1997), pp. 239~283.

정승은, “창작국악 작품의 교재화를 위한 작품 선정 및 학년별 단계짓기 연구,” 청주: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0.

홍미나, “이해식류 가야고산조 ‘흙담’의 연주법에 관한 연구,” 용인: 용인대학교 예술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9.

 

 사전

이희승, [국어대사전], 서울: 민중서림, 1981(32刷).

[국어사전], 서울: 동아출판사, 1986(三版).

 

JOURNAL

[東亞日報], (1989. 10. 25), (1990. 4. 29), (1990. 5. 2).

[文藝年鑑](1979년도), 서울: 韓國文化藝術振興院, 1980.

[문화예술], 서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98. 11월호.

[서울신문], 1969. 11. 13.

[음악저널], 서울: 음악저널사, 1990. 1월호.

[주간한국], 서울: 한국일보사, 1969. 11. 9.

KOREA TIMES, 1969. 11. 9.

 

악보

李海植, 國樂管絃樂曲集 [海東新曲], 慶山: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3.

李海植流 國樂器獨奏를 위한 創作曲集 [흙담], 慶山: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李海植, 국악관현악곡집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서울: 圖書出版 수문당, 1990.

[’89 서울음악제작품집?, 서울: 한국음악협회, 1989.

 

 음반

閔美蘭, 「伽倻琴音樂史選曲展」 LPⅠ(1960年代), 서울: 지구레코드-JLS 12024 74, 1992.

이해식 국악작곡집 CD 「바람과 춤터」, 서울: 예성음향 YSCD-008, 1999.

李海植 創作曲集 LP 「바람과 여자」, 서울: 서울음반 SRB-019, 1992.

 

연주회 프로그램

금호갤러리 <영재콘서트 김민주 가야금 이야기, 그 두 번째>(25현가야고독주곡 「명상하는 사람을 위한 바람의 빛깔」 초연), 2000. 11. 7. 금호 리사이틀홀/서울.

대전시립연정국악연구원 제6회 정기연주회(「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지휘/지원석, 2000. 5. 31. 대전시민회관 대극장/대전.

未來樂會 제4회 作曲發表會(「바람의 춤」 초연), 단소/김철호, vocal/김영동, 해금/송권준․양경숙, 피리/사재성, 타악기/백효숙․김재운, 지휘/김용만. 1979. 11. 13. 국립극장 소극장/서울.

朴貞姬 가야금독주회(「흙담」), 장고/박문규, 1980. 12. 19. 명동 유네스코회관(11층) 연주장/서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제10회 국악정기연주회(「흙담」 초연), 가야고/심영인, 장고/金正秀, 1969. 11. 4. 명동 국립극장/서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제26회 국악정기연주회(「산굿」 초연), 지휘/이성천, 1984. 10. 26. 국립극장 소극장/서울.

영남대학교 음악대학 제14회 국악정기연주회(「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지휘/최문진, 1995. 6. 2. 시민회관 대강당/대구.

任田琴會 창단연주회(「고풀이」 초연), 화현금/이재화, 장고/강호중, 1998. 10. 15. 국립국악원 우면당/서울.

제10회 대한민국국악제(「바람의 말 제2번」 초연), 대구시립국악관현악단, 지휘/장명화, 1990. 9. 11. 문화예술회관/대구.

제11회 대한민국 무용제(「갈숲」 초연), 안무/정귀인, 1989. 10. 20. 문예회관 대극장/서울.

제21회 서울음악제(「줄풀이 제2번」 초연), 가야고/지애리, 장고/김선옥, 1989. 11. 7. 문예회관 대극장/서울.

중앙국악관현악단 제7회 정기연주회(「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초연), 지휘/박범훈, 1990. 4. 30. 호암아트홀/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