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2010. 9. 28. 수정(up grade) 하였음.
이 대담은 ⅠㆍⅡ편 중에서 Ⅰ편임.
color letter는 내주(內註)임.
한국음악학학회 20주년 기념 학술대회
-Ⅰ-
주제: “오늘의 창작음악 어떻게 볼 것인가?”
주최: 한국음악학학회ㆍ한국국악학회ㆍ한국작곡가협회
일시: 2006년 11월 9일(목)~11일(토)
장소: 충무아트홀 컨퍼런스홀(서울 중구 신당동)
<섹션 1>
11월 9일(목) 14:00~18:00/작곡가와의 만남(대담형식)
사회: 조선우(동아대학교 교수)
개회사: 김춘미 회장(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기조발표: 이강숙 명예회장(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
대담 1/국악작곡가 이해식(영남대학교 교수)
대담자: 윤신향(계명대학교 초빙교수)
한국음악학학회 2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 [오늘의 창작음악 어떻게 볼 것인가?],
대담: 윤신향 vs 이해식. 2006. 11. 9. 충무 아트홀/서울.
2006년 11월 9일~11월 11일 사이에 서울 충무아트홀에서 한국음악학학회ㆍ한국국악학회ㆍ한국작곡가협회 공동 주최로 한국음악학학회 2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는데 그 주제는 “오늘의 창작음악 어떻게 볼 것인가?”였다. 이 학술대회 첫째 날(2006. 11. 9. 목)은 “작곡가와의 만남”으로 국악작곡가 이해식(영남대학교 교수)과 윤신향(계명대학교 초빙교수)의 대담이었다. 대담자 윤신향은 발제문으로 “작곡가 이해식과의 만남”을 이 날의 학술대회지 [오늘의 창작음악 어떻게 볼 것인가?], 1~9쪽에 걸쳐서 게재하였다. 아래의 글은 이 발제문을 윤신향이 [작가와 작품] “‘춤의 음악 되기’-‘음악의 춤 되기’ : 작곡가 이해식”이라는 제목으로 다소 수정하여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6](서울: 도서출판 예종, 2006), 44~54쪽에 재게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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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
‘춤의 음악 되기’-‘음악의 춤 되기’ : 작곡가 이해식
윤 신 향
1. 대담자의 변(辯)
한 작곡가의 작품보다는 글을 먼저 접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내 발이 게으른 탓도 있겠으나, 접하고 싶어도 손닿는 곳에 자료가 잘 없다는 현실 탓도 있다. 이해식의 경우도 먼저 글을 통해서였다. 평론에 투영된 자신의 작품양식에 재접근한 논문과, 한국의 상여소리에 대한 논문이 그것이다(이해식, “음악사적 의미로서의 작곡가의 작품양식 연구 -이성천의 평론에 투영된 나의 작품양식의 재접근-,” [음악과 문화] 제5호, (대구: 세계음악학회, 2001), 67~92쪽; 이해식, “한국의 상여소리,” [낭만음악](서울: 낭만음악사, 2005), 55~102쪽). 올해 6월에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대담과 평론들, 작품해설을 함께 엮어서 <이해식의 작곡노트 넘겨보기>(대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6)라는 책을 내어 놓았다. 그의 작품세계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게 해 주는 이 책은 실지 작품에 대한 호기심도 불러일으킨다. 작곡자의 배려로 접하게 된 주요작품들은 작품에 투영되는 한 작곡가의 생존방식이 궁극에는 나를 돌아보고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는 평소의 믿음을 더 확고하게 해 준다.
비평에 대한 이해식의 기대가치는 여타의 작곡가와는 좀 다르다. 그는 작품에 대한 명곡 해설식의 접근보다는, 작품의 내면에 깃든 작가의 정신과 음악사적 의미, 그리고 문화적 위치 파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기대가치는 내가 평소에 작곡가를 바라 볼 때 염두에 두는 부분이기도 하므로 내심 반갑기도 하다.
이해식은 의자에 앉아서 머리로 곡을 쓴다기보다는, 부단히 떠다니며 몸으로 곡을 쓰는 작곡가로 다가 온다. 이러한 성향은 현장의 소리를 채집하여 작품의 재료로 응용한다거나, 음악 속에서 추구하는 춤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모습에서 역력히 보인다. 창작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1968년부터 2006년까지 약 40년 동안 무려 120 곡을 생산해 낸 이력에서 엿볼 수 있다.
2006년 11월 9일부터 11일까지 한국음악학학회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한국국악학회, 한국작곡가협회와 공동으로 개최되었다. 첫날 이루어진 이해식과의 대담은, 그가 꾸준한 창작활동을 벌여 왔으나 학문적으로 거의 조명되지 않았던 중견 작곡가라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었다고 본다. 대담에서는 <The Junction(旌善)>(1992), <해금을 위한 상(像)>(1977), <춤질내기>(2004)의 음향자료와 영상물을 부분적으로 감상하고 거기에 대한 작곡가의 설명을 들었다. 이해식과의 대담을 준비하면서 만나게 된 그의 작곡 화두와 창작국악의 근원적인 쟁점들, 그리고 대담 후에 추가된 사항을 보완하여 엮어 보았다.
2. ‘춤의 음악 되기’ - ‘음악의 춤 되기’
1) 토속민요의 현대화
이해식은 창작 초기부터 토속민요를 작품의 소재로 수용해 왔다. 직접 녹음한 토속민요를 재구성하거나 현장의 소리를 공연현장에서 재현하기도 하고, 토속선율을 단편적으로 활용, 변주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재래식 가옥의 문풍지 바람소리를 표상한 「풍무」(風舞)(1979)에서는 그가 해남군에서 녹음한 <둥당애 타령>과 농요 <절로소리>가 재구성되며, 합창과 국악관현악을 위한 「두레사리」(1980)에서는 경기도 고양군 송포리의 <호미걸이 소리>가 송포리 마을의 주민들에 의해 무대에 실지로 재현된다. 이 농요에서 그에게 특히 감명을 준 <긴소리>는 플루트와 25현 가야금을 위한 「바람터」(1999)에서도 부분적으로 응용된다.
작곡자는 토속민요를 활용함에 있어서 자주 춤을 지향한다. 그 한 예가 현대무용 조곡을 의도한 피아노 독주곡 「The Junction」이다. 「The Junction」이 내포하는, 지명적인 ‘정선[ʤʌɧkʂən]’과 ‘정션[ʤʌɧkʃən]’의 의미론적 차이는 토속민요와 그것의 외부의 교차로 인한 문화적 변이작용을 실지로 상징한다. 이 곡에서 정선아리랑의 선율적 단편은 명료한 형식구조 속에서 변용된다. 빠른 제1곡에서 민요의 시김새적 윤곽이 주요 리듬적 음형동기로 변용되는데, 아리랑 선율의 형체는 엮음 아리랑의 흔적을 보이는 제2곡 후, 사설조의 색채를 지닌 제3곡에서 잘 드러난다. 제 4곡에서 더 강화되는 변주 요소는 회상적 서주부를 가지는 제5곡에서 응축, 확대되면서 선율의 원형은 사실상 해체된다. 무엇보다도 민요 선율의 시김새 부분이 작품의 주요 리듬적 음형동기로 변용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2) ‘춤’ㆍ‘바람’ㆍ‘두레’라는 화두(話頭)
이해식은 40년에 가깝도록 춤이라는 화두를 놓지 않고 있다. 이것은 동아콩쿠르 수상작인 「피아노 트리오」(1968)에서부터 탱고를 활용한 「플루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두레맞이」 협주곡(2001)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구체적인 춤을 소재로 삼지 않더라도, 이해식의 음악은 근본적으로 춤을 지향한다. 이 성향은 1985년 당뇨 진단을 받고 1988념부터 디스코를 추기 시작한 이후부터 보다 더 표면화된다. 현재까지도 그는 춤을 생활화하고 있다.
이해식의 말을 들어 보자:
“내가 춤을 추구하고 춤판에 뛰어드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직접적 몸짓이고 또 삶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춤은 작품에 분명한 디자인을 요구하는 동시에 작품의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이해식, 국악관현악곡집 [젊은 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서울: 수문당, 1990), 머리말 3쪽).”
“춤은 나의 작품이 착상되는 자리이며 나의 작품에서 춤 관련 이외의 자잘한 것은 별로 없다. 춤을 내 작품의 태반으로 삼는 것은 거기에는 항상 번쩍이는 소재가 싹트고 창작의 충동을 작품 속으로 끌고 가는 마력이 있기 때문이다. [...] 나의 모든 작품은 제의(祭儀) 관련의 몸짓이다. 나의 작품에서 제의는 관습적인 비전(秘傳)이 아니라 내 음악의 미래를 내다보는 열림의 의식이다(이해식, [이해식의 작곡노트 넘겨보기](경산: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6), 368~369쪽).”
이해식이 추구하는 춤의 진원지는 전통적 굿판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세계는 ‘춤의 음악 되기’와 ‘음악의 춤 되기’의 순환적 운동성을 지닌다. 1979년작 「해동신곡」(海東新曲)은 상고대의 제례의식을 작품의 ‘전경’(前景)이라고 밝히는데, 이 또한 굿판의 그것과 멀리 있지는 않다. 이해식의 또 하나의 화두는 무속의 엑스터시와도 연계되는 ‘바람’이다. 「풍무」(1979)에서 구체화되는 이 표상은 「바람의 여자」(1992)로 대변되는 1990년대 초반의 작품들을 거쳐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해식은 굿판의 춤과 놀이 요소가 우리 민족의 농사일에도 깃들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춤의 바탕인 리듬이 노동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당연하다. 그가 놀이를 작품으로 형상화함에 있어서 즐겨 표방하는 것은 한국 고유의 노동기구 두레이다. 농사일에서 조화를 상징하는 두레가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서양악기와 국악(기)와의 두레질’을 의미한다고 한다. 서양 발성과 토속민요의 소리가 대조를 이루며 어우러지는 합창과 국악관현악을 위한 「두레사리」(1980), 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두레」(2000), 탱고를 수용한 플루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두레맞이」(2001)는 모두 문화 사이의 두레질을 표방한다고 볼 수 있다.
3. 창작국악의 신분에 대한 초(草)
1) 작품의 영역과 관련하여
이해식의 창작정신을 읽어내자면, ‘신국악’, ‘창작국악’, 또는 ‘창작음악’에 대한 명명방식의 문제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는 이해식뿐만 아니라 김기수에서부터 황병기에 이르기까지 국악기로 창작해 온 작곡가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들이 전통과 대결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른데, 이해식은 그 가운데서도 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악기의 선택에 따르는 작품의 영역구분은 무의미하다고 하며, 작품 자체의 ‘색깔’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필자도 이제 연주 매체뿐만 아니라 전통선율이나 장단의 적용 유무가 창작국악의 기준이 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전통선율과 장단을 현대적으로 변용하는 양악 출신의 작곡가가 얼마나 많은가. 뿐만 아니라 국악기를 디지털 음향도구로 사용하는 추세도 증대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대개 국악기를 사용하고 전통음악의 요소를 재료로 활용하는 작품의 영역을 창작국악이라고 하고, 이런 류의 작품을 쓰는 작곡가를 국악작곡가라고 불러 왔다. 그리고 국악기 위주로 편성된 관현악을 국악관현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국악기와 양악기가 교합해 가고 있는 이 시점에, 이러한 명명 방식이 과연 유효한지 의문이 든다. 이해식은 한국 민속음악의 특징들을 재료화함에 있어서, 서양 전통의 교회선법, 조성어법, 12음을 고유의 감각으로 변용하며, 전위적인 음향어법을 시도하기도 한다. 국악의 ‘국’(國)을 타파하자고 주장하는 이해식에게, 국악작곡가라는 명칭은 왠지 어색하다. 그에게는 개방적 성향을 지닌 ‘토종’ 작곡가라는 역설적 이름도 적합할 듯하다. 왜냐하면 이 땅의 흙과 더불어 성장한 그가 ‘국’(國)이라는 관념 바깥의 ‘바람’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토종’이란 사실 이해식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유학하지 않고 이 땅에서 민속음악의 요소를 서양의 기법적 그릇에 잘 담아내는 강준일과 같은 작곡가에게도 해당된다. 작품의 영역을 구태여 구분하자면, 성장배경과 교육환경, 작품의 내용이 연주매체나 재료보다 더 적합한 기준이 될 것이다.
이해식의 주요 창작매체는 단연 국악관현악이다. 국악관현악곡은 합창과 협주가 들어가는 악곡을 포함해서 전 작품의 4분의 1이 훨씬 넘는다. 관현악 창작이 독주나 실내악곡에 비해 기법적으로 더 어렵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는 적은 수가 아니다. 즉, 국악관현악은 이해식에게 창작의 매체일 뿐 아니라 창작의 중요한 ‘일터’요 ‘춤터’가 되어 온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국악관현악은 창작국악의 명맥 유지를 위해 근간(根幹)이 되는 장르이다. 그런데 이해식은 근자에 서양 전통악기를 국악관현악에 삽입하는가 하면, 피아노를 국악관현악의 협주상대로 활용하고 있으며, 라틴 아메리카 춤도 여기에 혼용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이 국악관현악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의 입지를 모호하게 하는 것인지는 아직 더 기다려 볼 일이다.
2) 음악창작의 이름
1943년 전라북도 부안에서 출생한 이해식은 전후(戰後) 한국 농촌의 사회 환경을 접하며 성장했다. 전주 사범학교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1965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 입학했다. 국악과 소속이었으나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했던 서양음악 학습을 주로 했고(정회갑 사사), 대학원에서도 양악 작곡공부를 했다. 그는 대학 시절 바르토크의 「미크로코스모스」(Microcosmos) 전곡을 스스로 섭렵하기도 했다. 즉 한국의 토속정서를 체험했던 그는 국악과라는 테두리 안에서도 서양의 작곡기법을 두루 섭렵했던 것이다. 그 결과 대학 4학년이던 1968년 동아콩쿠르에서 한국 음악콩쿠르 최초로 서양작곡 부문(1등 없는 2등)과 그 해 신설된 국악작곡 부문에서 동시에 입상을 했다(같은 해에 국립국악원 제8회 신국악 작곡콩쿠르에도 입상했다).
1970년대 KBS-FM 국악방송 프로듀서 시절, 그는 방송 제작을 위해 향토음악을 직접 채집하기도 했고, 밤에는 창작에 전념하며 작곡가로서의 길을 꾸준히 걸었다. 「해금을 위한 상」(像)(1977), 「해동신곡」(海東新曲)(1979)과 같은 수작(秀作)들이 이 시절에 탄생했다.
1981년 영남대학교 작곡과 교수로 부임한 후(1982년 국악과 개설과 함께 국악과 교수가 됨) ‘굿’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탄생했고, 무용조곡 「흙」(1986)을 기점으로 무용음악에 대한 창작활동은 더 활발해진다. 현재 그는 댄스스포츠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위의 이력과 창작활동으로 미루어 볼 때, 양악(기)와 국악(기)의 이분구도는 이해식에게 창작초기부터 큰 의미가 없었던 것 같다. 1968년 입상곡 「가야고를 위한 3장」의 2악장은 론도형식을 사용했으며, 「해금을 위한 상」이나 「해동신곡」에 나타나는 음향어법은 서양 현대음악의 그것과도 교차하는 측면이 있다. 이해식의 이력은 음악이 개별 창작의 관점에서는 ‘하나’라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 이는 바르토크가 헝가리의 민요를 현대기법으로 조리했다고 해서, 그의 이름이 둘이 될 수 없는 원리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4. 통합을 향한 전이(轉移)의 몸짓?
이해식의 사유는 ‘토종’작곡가답지 않게 열려 있다. 그의 음악에서 감지되는 독특한 신명의 기운은 국악기의 표현 가능성을 확대하고 새로운 음향도구를 실험하면서 발화(發話)된다. 이해식은 소재의 근원이 한국 전통이든지, 서양 전통이든지, 남미의 춤이든지 간에, 작품의 개성을 위해서라면 주저하지 않고 수용한다. 또, 전통이 현재 불필요하거나 불편하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다만 1990년대 이후 증대되는 소재선택의 개방성과 작품의 질, 그리고 그것이 창작문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국악의 소재를 현대적으로 조리하는 이른바 ‘창작국악’은 온돌을 보일러로 개조하여 침대를 놓고 생활하는 “앉는 문화의 현대화”를 반영해 준다(이해식, 앞의 책, 179쪽). 이것은 창작국악의 문화적 신분에 해당된다. 창작국악 공통의 문화적 신분이 이해식 개인의 작품에서 어떻게 매개되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리듬의 운용방식과 대등하게 중요한 관현악법을 꼼꼼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굿판의 제의에 바탕을 둔다고 하는 이해식의 작품들은 대개 그것의 특성인 즉흥요소를 표면화하지는 않는다(가곡 「광무월」(狂舞月)과 같이 북 반주를 즉흥에 맡기는 경우는 있다). 굿판의 즉흥적 요소에 대한 21세기적 변용은 그가 추구하고 있는 작품의 무용적 색깔을 위해 더 다각적으로 시도해 볼만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국악(國樂)의 ‘국’(國)을 타파하고 나면 ‘악’(樂)이 남는다. 이미 「밧삭」(1976)에서 국악에 대한 반란을 표명한 이해식은 ‘악’(樂)마저도 춤을 위해 열어 놓고 있다. 그가 지향하는 ‘춤의 음악 되기,’ ‘음악의 춤되기’는 한국의 음악사와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동서양의 악기와 라틴아메리카 춤을 결합하는 근자의 시도는 굿판의 현대화를 넘어, 그것의 세계적 변용이라는 견지에서 해석될 수 있을까? 최근에 선보인 「국악관현악을 위한 전이」(轉移)(2006)는 국악기와 양악기의 통합을 향한 또 하나의 몸짓인가? 한 작곡가의 이름을 묻는 작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이 결국 이 사회의 문화적 신분 내용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라벨도 바르토크도 아닌 이해식의 이름 연구는 창작음악 담론의 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장르별 작품목록
(작품 제목의 앞에 붙은 번호는 연도순으로 정리된 목록의 번호이다. 연도순 작품목록은 [이해식의 작곡노트 넘겨보기](경산: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6), 468~472쪽 참조)
[가곡, 가요, 동요]
No.5.「진달래 꽃」(김소월) 가곡(1969)
No.6.「맘 켕기는 날」(김소월) 가곡(1969)
No.7.「두 사람」(김소월) 가곡(1969)
No.8.「나그네」(박목월) 가곡(1969)
No.9.「임 오시던 날」(노천명) 가곡(1969)
No.19.「광무월」(狂舞月)(허 민) 가곡(1976)
No.35.「이별가」(박목월) 가곡(1982)
No.42.「그 여자Ⅰ」(강은교) 가곡(1984)
No.47.「시련」(심인택) 가곡(1985)
No.57.「가슴소리」(심인택) 가곡(1987)
No.73.「꽃을 바치는 노래」 가곡(1992)
No.74.「애원성」(哀怨聲) 가곡(1992)
No.78.「민들레」(홍순관) 국악가요(1994)
No.79.「꿈」(피천득) 국악가요(1994)
No.80.「고향」(김준태) 국악가요(1994)
No.81.「묵은 옷」(홍순관) 국악가요(1994)
No.82.「풍경」(홍순관) 국악가요(1994)
No.83.「해 넘어가기 전의 기도」(김관식) 국악가요(1994)
No.87.「시내」(피천득) 가곡(1995)
No.88.「그림자」(임병호) 성인이 부르는 국악동요(1996)
No.91.「그 남자」(이해식) 가곡(1997)
No.110.「사랑 散歌」(박금규) 가곡(2002)
No.116.「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서 정 주 ) 가 곡 ( 2 0 0 6 )
[합창]
No.39.「아부레이수나」 혼성합창(1983)
No.44.「왕의 왕」 혼성합창(1985)
[기악 독주]
No.1.「젓대 독주곡 산조」(1968)
No.3.「가야고를 위한 3장」(1968)
No.10.「흙담」 가야고 독주곡(1969)
No.11.「구름터」 가야고 독주곡(1970)
No.23.「별풍류」(別風流) 가야고 독주곡(1977)
No.25.「해금을 위한 상」 (像)해금 독주곡(1977)
No.34.「달구벌소리 가야고 독주곡(1981)
No.48.「사마다」(Samada) 해금 독주곡(1985)
No.50.「술대굿」 거문고 독주곡(1986)
No.53.「굿을 위한 피리」(1986)
No.59.「줄풀이 제1번」 18줄 가야고 독주곡(1988)
No.64.「줄풀이 제2번」 18줄 가야고 독주곡(1989)
No.65.「춤피리」 피리 독주곡(1989)
No.76. 「The Junction」(旌善) Piano 독주곡(1992)
No.85.「금파람」(琴風) 18줄 가야고 독주곡(1994)
No.94.「고춤」(琴舞) 거문고 독주곡(1998)
No.95.「고풀이」(琴解) 화현(和絃) 거문고 독주곡(1998)
No.99.「춤사리기」 해금 독주곡(1999)
No.105.「명상하는 사람을 위한 바람의 색깔」 25현 가야고 독주곡(2000)
No.107.「나위사위」 25현 가야고 독주곡(2000)
No.108.「25현금을 위한 불꽃으로부터의 명상」25현 가야고 독주곡(2001)
[중주 및 앙상블]
No.2. Piano trio(1968)
No.4. Torso for Cello and Piano(1969)
No.13. Contrast and Frisk(clarinetㆍpianoㆍjing. 1971)
No.21. Clay Statues Clarinet Quintet(1977)
No.22.「사위」 細樂(1977)
No.28.「삼위 위상」(三爲 位相) 중주곡(1979)
No.29.「바람의 춤」(風舞) 실내악(1979)
No.32.「맥류」(脈流) 실내악(1980)
No.33.「삼굿」(三祭)(oboeㆍtimpaniㆍjing. 1981)
No.36.「管을 위한 流」 실내악(1983)
No.37.「압량벌소리」 중주곡(1983)
No.41.「피리를 위한 호드기」(1984)
No.71.「바람의 여자」 피리와 실내악(1992)
No.84.「기도」 단소와 18현 가야고
No.89.「춤바래기」 해금․25현 가야고․거문고(1997)
No.97.「바람터」 Flute과 25현 가야고(1999)
No.100.「달춤」 Clarinet과 25현 가야고(1999)
No.101.「두 대의 양금을 위한 Prepared」 양금 2중주(2000)
No.103.「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춤두레」(2000)
No.104.「춤 불러내기」 해금과 21줄 가야고(2000)
No.111.「소리질내기」 거문고와 25현 가야고(2003)
No.113.「현대의 거믄 학 접어보기」실내악(2003)
[국악관현악]
No.12.「당산」(堂山) 국악관현악(1970)
No.14.「원풍」(苑風) 국악관현악(1971)
No.15.「춤거리」 국악관현악(1973)
No.17.「탑원」(塔苑) 국악관현악(1974)
No.24.「사위 제2번」 국악관현악(1977)
No.26.「원심과 구심」(遠心․求心) 국악관현악(1978)
No.27.「승천」(昇天) 국악관현악(1978)
No.30.「해동신곡」(海東新曲) 국악관현악(1979)
No.38.「들굿」(野祭) 국악관현악(1983)
No.40.「산굿」(山祭) 국악관현악(1984)
No.49.「대굿」(竹祭) 국악관현악(1985)
No.49.「대굿」(竹祭) 국악관현악(1985)
No.51.「국악관현악을 위한 굿연습」(1986)
No.56.「디스코」(DISCO) 국악관현악(1987)
No.60.「춤을 위한 支와 干」 국악관현악(1988)
No.62.「춤을 위한 국악연습」 국악관현악(1989)
No.66.「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국악관현악(1990)
No.67.「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제2번」 국악관현악(1990)
No.72.「길춤」 국악관현악(1992)
No.75.「성주춤」(城主舞) 국악관현악(1992)
No.77.「춤맞이」 국악관현악(1993)
No.98.「국악관현악을 위한 디스코」(1999)
No.117. 「 국 악 관 현 악 을 위 한 전 이 」 (轉移) 관 현 악 ( 2 0 0 6 )
[관현악과 독창, 또는 합창]
No.18.「뜰모리」 국악관현악과 합창(1976)
No.20.「밧삭」(外數) 국악관현악과 합창(1976)
No.31.「두레사리」 국악관현악과 합창(1980)
No.45.「어방굿」(漁坊祭) 국악관현악과 합창(1985)
No.46.「향발굿」(響鈸祭) 국악관현악과 합창(1985)
No.52.「종굿」(鍾祭) 국악관현악과 합창(1986)
No.92.「새 취풍형」(新醉豊亨) 국악관현악과 독창(1998)
No.96.「등장춤」(登場舞) 관현악과 독창(1998)
[합주 및 협주]
No.90.「축제를 爲한 춤피리」 피리 합주(1997)
No.93.「해궁」(奚宮) 해금 합주(1998)
No.102.「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두레」 피아노협주곡(2000)
No.109.「플루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두레맞이」 협주곡(2001)
No.115.「Piano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질내기」협주곡(2004)
[무용음악]
No.54.「흙」 무용조곡(1986)
No.61.「갈숲」 무용음악(1989)
No.63.「춤을 위한 두 사람의 연주」 무용음악(1989)
No.68.「가문 날의 꿈」 무용음악(1990)
No.112.「현대인을 위한 춤덜구」춤음악(2003)
No.114.「국악원 삼바―그리움으로 부르는 노래」춤음악(2003)
[그 외]
No.16.「호랑이와 두 남매」 인형극(1974)
No.43.「달아 달아 밝은 달아」 연극음악(1985)
사회자: 지금까지 한국음악학학회 이강숙 명예회장의 기조발표로 “예술의 이해와 선이해의 관계”이었습니다(이강숙, “예술의 이해와 선이해 관계,” [오늘의 창작음악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음악학학회 20주년 기념 학술대회 기조발표 2006. 11. 9.~11. 충무아트홀 컨퍼런스홀/서울). 선생님 감사합니다. 열광적인…, 대단히 감동적으로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 오늘 섹션 제1의 주제로 <작곡가와의 만남>에 저희가 본격적으로 진입하겠습니다. 첫 번째 대담으로 영남대학교 이해식 교수님과 대담자 윤신향 교수님 두 분을 함께 앞(단상)으로 모시겠습니다. 여러분 환영해주십시오. 먼저 이해식 선생님을 여러분이 다 아시겠지만 더 좋은 시간을 갖기 위해서 윤신향 선생님께서 준비하신 글을 아마 7~8분 정도로 압축해서 먼저 들으시겠습니다. 여러분, 일차적으로 윤신향 선생님이 쓰신 “작곡가 이해식과의 만남”을 초록색 책자 -[오늘의 창작음악 어떻게 볼 것인가?]- 1 페이지를 봐주시고요, 이 글이 끝나면 윤신향 선생님께서 질문하실 테고 이해식 선생님의 답변을 듣겠습니다. 이 시간은 거의 이해식 선생님의 말씀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전체 시간은 한 시간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윤신향 선생님께 먼저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신향: 네 안녕하세요? 오늘 대담을 맡게 된 윤신향입니다. 오늘 제가 대담을 할 생각으로 왔는데, 조선우 선생님께서 지금 앉아계시는 분들이 -이 대담에 관한- 사전 정보가 없고, 또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텍스트를 간단하게 읽어 달라고 해서 중요한 챕터만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럼 가지고 계시는 책자에서요 2쪽….
이해식 선생님은 굉장히 많은 작품을 쓰셨는데요, 저는 나름대로 작곡가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작품과 작가정신이 있고 작가정신을 가지고 작품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작가가 스스로 하는 얘기와 작품과 많이 다르다고 하는 얘기는 이해가 잘 안되는데, 오히려 작곡가가 이야기함으로써 작품의 본질을 가리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봤었어요. 또 어떤 경우는 작곡가가 자기의 사유(思惟) 과정을 쭉 얘기할 때 작품을 따라가 보면 어느 정도 동일화가 되는 듯한 그런 작곡가로 나누는데요. 이해식 선생님의 -작품에 관한- 사유의 과정이 요 근래에 [이해식의 작곡노트 넘겨보기]라는 책으로 나와서(경산: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6, 472쪽). 상당히 작곡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이 책에서 작곡자가 얘기하는 -사유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지금 이강숙 선생님이 말씀하신 룰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즉흥적으로 생각해보니 제가 과연 이강숙 선생님이 말씀하신 선(先) 이해가 완전히 되어 있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창작음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지 몇 년밖에 안됐기 때문에 현재의 창작음악언어에 대한 룰을 반도 캐치(catch)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것도 국악 작곡가라고 하는 이해식 선생님의 작품을 접하다보니 국악에 대해서도 문외한이고 국악기에 대해서도 너무 모르는데다가 -이해식 선생님의 작품이- 전부 국악기로 연주되어서 맨 처음에는 상당한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이강숙 선생님 말씀하신 선 이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아직 50프로도 캐취하지 못한 거 같아요. 제가 음악을 듣고 사유를 따라가 볼 때 감으로 오는 감성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저는 이렇게 이해가 되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런 부분들은 오늘 대담을 통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럼- 먼저 2쪽부터 읽겠습니다.
이해식 선생님은 음악 창작에 있어서 40년에 가깝도록 춤이라는 음악 외적 장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아콩쿠르 수상작인 「피아노 트리오」(1968)에서부터 탱고를 활용한 「플루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두레맞이'」(2001) 협주곡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인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구체적인 춤을 소재로 하지 않더라도 그는 근본적으로 ‘음악의 춤되기’를 추구합니다(윤신향, “‘춤의 음악되기’-‘음악의 춤되기’: 작곡가 이해식,”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6](서울: 도서출판 예종, 2006), 44~54쪽 [작가와 작품]. 이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담자의 변(辯) 2. ‘춤의 음악되기’-‘음악의 춤되기’ 1) 토속민요의 현대화 2) ‘춤’ ‘바람’ ‘두레’라는 화두(話頭) 3. 창작국악의 신분에 대한 초(初) 1) 작품의 영역과 관련하여 2) 음악창작의 이름 4. 통합을 향한 전이(轉移)의 몸짓). 이 성향은 1990년대 이후 더욱더 표면화 되며 현재 그는 10년이 넘도록 스스로 춤을 추고 있습니다. 작곡가인 그는 왜 이토록 집요하게 춤이라는 것에 매달리는가? 이해식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춤을 추구하고 춤판에 뛰어드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직접적 몸짓이고 또 삶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춤은 작품에 분명한 디자인을 요구하는 동시에 작품의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이해식, 국악관현악곡집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서울: 도서출판 수문당, 1990), 머리말 Ⅱ쪽, 또는 [산조의 미학적 구조론](경산: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6), 364쪽).
춤은 나의 작품이 착상되는 자리이며 나의 작품에서 춤 관련 이외의 자잘한 것은 별로 없다 춤을 내 작품에 태반으로 삼는 것은 거기에는 항상 번쩍이는 소재가 싹트고 창작의 충동을 작품 속으로 끌고 가는 마력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작품은 제의(祭儀) 관련의 몸짓이다 나의 작품에서 제의는 관습적인 비전(秘傳)이 아니라 내 음악의 미래를 내다보는 열림의 의식이다([이해식의 작곡노트 넘겨보기], 368~369쪽).
여기까지가 최근에 출판된 [이해식의 작곡 노트 넘겨보기]라는 책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이해식 선생님께서 추구하는 춤의 진원지는 전통적 굿판의 제의에 있습니다. 1979년 작 「해동신곡」(海東新曲)은 상고대의 제례의식을 작품의 ‘전경’(前景)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 또한 굿판의 그것과 멀리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무속의 엑스타시(ecstasy)는 공(空)의 속성을 지닌 ‘바람’과도 연계되므로 바람은 자주 작품의 표상이 되어왔습니다. 「풍무」(風舞 바람의 춤 1979)에서 구체화되는 이 표상은 <바람의 여자>(1992)로 대변되는 1990년대 초반의 작품들을 거처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해식 선생님은
굿판의 춤과 놀이(네덜란드의 학자 요한 호이징하(Johan Huizinga)는 <인간의 놀이>라는 그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에서 놀이는 창조의 근원이라면서, 현대 인류가 망각한 고대의 신성하고 삶이 충만했던 놀이 정신의 회복을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모든 삶을 놀이로 파악한다. 나는 이 책을 읽은 후에 내 작품의 초점을 춤과 놀이로 잡는 학문적 전거(典據)로 삼았다. 악기연주도 적극적인 놀이이다. 국내 번역판으로는 Johan Huizinga(權寧彬 譯), [호모 루덴스], 서울: 弘盛社, 1981, 또는 金潤洙 譯, 놀이와 문화에 관한 한 연구 [호모 루덴스], 서울: 까치, 1981) 요소는 농사일에도 깃들어 있다고 이해식은 봅니다. -춤의 바탕인- 리듬의 본질이 노동에 -따르는 리듬의- 본질과도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놀이 요소를 작품으로 형상화함에 있어서 <두레>라는 농구(農具)를 표방 합니다. 농사일에서 조화를 상징하는 두레가 문화적 측면에서는 서양악기와 국악(기)와의 두레질을 의미한다고 합니다(“<춤두레=춤+두레>임은 춤이 굿의 중심이어서 그렇다. <춤두레 제2번>은 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동ㆍ서의 두레질이다. 두레질을 하는 중에 서양악기(pianoㆍoboeㆍviolinㆍcello)와 국악관현악이 복조(複調 poly tonality)로써 마치 두레 속의 물이 출렁거림처럼 충돌하기도 한다.” 이해식 작곡 「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두레 제2번」을 초연한 국립국악관현악단 제45회 정기연주회 <협주동화> 프로그램 13쪽. 피아노/이향아, 지휘/조정수, 2007. 11. 29.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서울). 서양발성과 실지 민요의 소리가 대조되며 어우러지는 「합창과 국악관현악을 위한 두레사리」(1980)ㆍ「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두레」, 탱고를 수용한 「플루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두레맞이'」(2001)는 모두 문화 사이의 두레질을 표방한다고 볼 수 있는데 창작의 시기가 다른 「두레사리」는 후자의 두 작품들과 양식적으로 매우 다르게 느껴집니다.
위의 화두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이해식의 주요 창작 매체는 -단연코- 국악관현악입니다. 국악관현악곡은 합창과 협주가 들어가는 악곡을 포함해서 전작품의 4분의 1이 훨씬 더 넘습니다. 창작 국악의 명맥유지를 위해 근간(根幹)이 되는 국악관현악은 이해식에게 창작의 매체일 뿐만 아니라, 창작 인생의 중요한 ‘일터’요 ‘춤터’가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일터요 춤터- 근자에 피아노를 비롯한 서양 전통 악기와 라틴 아메리카 춤을 수용하는 실험의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국악기와 양악기의 퓨전(fusion)적 ‘두레질’이 이국적 춤의 개입과 더불어 어떻게 발전해 갈지 궁금해집니다.
사회자: 네... 한 2분 정도만 더 말씀 하시면 좋겠네요. 이해식 선생님을 청중들에게 소개해주시면 됩니다.
윤신향: 그래서 제가 이해식 선생님을 명명(命名)하는 방식으로 국악작곡가라는 거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 하면서 상당히 개방적 성향을 지닌 <토종작곡가>라고 명명합니다. 유학하지 않고 한국에서 모든 서양음악 학습을 스스로 하셨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바깥 외부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성향에 대해서도 상당히 민감하신 것 같기 때문에, 그래서 이해식 선생님의 삶은 굉장히 열려있다고 보는데요. 특히 그동안 언급되지 않았던 해학적인 요소와, 한적(恨的)인 것보다는 굉장히 독특한 신명의 기운을 발화(發話)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발화>는 판소리에서 온 것입니다. 판소리에서 느껴지는 그런 것 하고 매우 가까운 신명, 판소리에 있는 해학이라든가 그런 것을 감지했습니다.
이해식 선생님의 음악에서 문화적 위치가 어디냐? 이것을 묻는다면 토속음악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해온 이해식 선생님의 작품들을 온돌을 보일러로 개조하여 침대를 놓고 생활하는 앉는 문화의 현대화에 비유하고 싶습니다(앉는 문화와 서는 문화에 대하여 이해식, “작품에서의 색깔있는 움직임,”(1994년 국악의 해 기념 학술회의 [2000년대를 향한 한국 창작음악의 회고의 전망], 126~128쪽, 또는 이해식, “Prism을 통해서 본 내 작품의 색깔에 대하여,”[韓國音樂硏究] 第31輯(서울: 韓國國樂學會, 2002), 156~159쪽, 또는 [이해식의 작곡노트 넘겨보기] 177~179쪽 참조). 그래서 이해식 선생님은 스스로 국악의 <국>(國)을 타파하자고 하는데요(나는 “<국>(國)”에 관한 소회(所懷)를 국립국악원 학술회의(1990. 10. 19. 국악당 소극장) 제3주제 “창작 판소리와 관련된 제문제”에 대한 질의 논평과, 문화체육부 ’94 국악의 해 제1차 세미나(1993. 12. 7. 국립국악원 소극장)에서 주제로 발표한 “국악의 해 의의와 추진 방향,” 또는 [이해식의 작곡노트 남겨보기](경산: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6), 115쪽에 밝힌 적이 있다), 국악의 <국>을 타파를 하고 나면 결국은 <악>(樂)이 남습니다. 그런데 「밧삭」(外數)에서 국악에 대한 반란(「국악관현악과 합창 밧삭」이 <88올림픽 문화예술축전 대한민국국악제―화합의 밤>에서 연주되었을 때(1988. 9. 13. 지휘/이상규, 국립국악당/서울), 이 연주회를 참관한 어느 중견 소설가는 「밧삭」이 “국악에 대한 반란”이라고 어느 월간지에 쓴 글을 기억하는데, 나는 그 월간지를 지금껏 찾지 못하여 그 소설가에게 e메일로 문의했더니 그도 글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南道지방을 배경으로 한 그 소설가의 소설을 여러 권 읽었는 데다 “국악에 대한 반란”이란 비평이 참으로 마음에 드는 까닭은 내가 만약 전통의 흉내나 내는 작품을 쓴다면 진정한 작곡가일 수 없기 때문이다[이해식의 작곡노트 넘겨보기], 152~153쪽])을 표명한 이해식 선생님은 이 <악>마저도 현재 춤을 위해서 개방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지향하는 <춤의 음악되기>, -이해식의 작품에서- 원래 춤이라는 것이 무속의 굿판에서 오는 것이며, <춤의 음악되기>, 또는 거꾸로 <음악의 춤되기>는 하나의 음악적 리듬이 여럿의 무용적 신분을 지니는 원리와 비유될 수 있을지... 아니면 동서양의 악기와 라틴아메리카의 춤을 결합하는 근자의 시도는 굿판의 현대화를 넘어 그것의 세계적 변용이라는 견지에서 해석될 수 있을까... 하는 그러한 질문까지 제가 와있습니다.
사회자: 네. 윤신향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제부터 선생님이 짧게 질문 하실 수 있구요. 이 시간을 전적으로 이해식 선생님께 드리겠습니다. 지금 윤신향 선생님이 발표하신 글의 내용에서부터 출발 하셔도 좋구요. 아니면 윤 선생님이 지금부터 묻는 질문부터 하나씩 답변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럼 넘어가겠습니다. 시작하십시오.
윤신향: 예 선생님. 반갑습니다. 저희들은 사전에 회동을 하긴 했습니다. 만나자마자 제일 먼저 식사부터 했는데요. -웃음- 제가 선생님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공부하지 않고 일단 선생님을 이렇게 좀 파악하면서 나름대로 생각한 게 있고, 먼저 선생님의 삶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는데, 지금 -여기- 앉아계신 많은 분들이 40대인데 선생님이 커 오신 성장배경, 40년대에 태어나셔서 5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니시고, 그때의 음악 환경이 저희하곤 좀 다를 것 같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고, 그 다음은 아주 본론으로 들어가서요, 1980년대에 와서 굿 음악을 내어 놓으시구, 1980년대 양악 계에서는 한창 민족음악론을 하고 있었는데 -이해식 선생님은- 영남대학교에 근무하면서 조용하게 <굿> 음악을 내어놓으시고, 1986년에 순수하게 무용을 위한 「흙」(1986)이란 작품을 내어 놓으셨는데요. 그리고 199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스스로 댄스 스포츠를 추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댄스스포츠를 추게 된 동기. 그것이 왜 음악 작곡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해식: 예 감사합니다. 제가 윤신향 선생님 말씀에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 새삼스러운 인사를 드리자면, 제가 KBS에서 영남대학교로 갈 때에 여기 계신 이강숙 박사님의 추천서를 들고 갔습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저도 벌써 반백(半白)이 되었네요. 그때의 은혜에 이어서 오늘 이런 은사(恩賜)를 받게 되어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조선우 선생님은 제가 [음악과 민족]에 논문을 낼 때(이해식, “산조의 미학적 구조론,” [음악과 민족] 제23호(부산: 민족음악학회, 2002), 161~192쪽. 이 논문은 동명(同名)의 이해식 논문집, [산조의 미학적 구조론](경산: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6), 385~435쪽에 再揭載되었음) 생면부지(生面不知)로 E 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걸었는데 그때 자상하시던 선생님을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서 고마움과 함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두 분께 인사로나마 챙기지 못했던 제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여러분 앞에 펼치는(고백) 바입니다.
김춘미 박사님은 아마 KBS-FM 방송을 통해서 저를 조금 흥미있는 대상이구나 싶어서 윤신향 선생님에게 추천한 거 같습니다. 어쨌든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거, 이 자리에 있게 된 거, 작품을 쓰고 음악을 함은 -모든 사람이 저를 사랑함 속에서 이루어짐이었는데- 그에 대해서 제가 -별다르게- 보답을 못했기 때문에 참 부끄럽습니다.
이해식이 1942년에 생겨난 80년이 넘은 집. 4칸짜리 초가건물이 모범농가로 선정될
만큼 내외구조를 완전히 개조하였다. 2006. 1. 28. Sony P7 녹화/이구.
제 생애(biography)랄 것까지야 그렇지만 저는 1942년(출생신고는 1943년생임)에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新雲里)에서 생겨났습니다. 신운리라면 새로운 구름동네라는 뜻이어서 <구름터>입니다. 제가 쓴 최초의 가야고 독주곡 「구름터」는 제가 제51신병교육대에 입대해서 섰는데 <구름터>는 바로 제가 태어난 동네의 이름입니다.
아주 오래된 사진: 초등학교 4학년 때(1953) 학예회 기념으로
쌍둥이 작은아버님의 슬하인 5학년 사촌형과 함께. 왼쪽이 이해식
제가 부안초등학교 1학년 때 6.25 사변이 일어났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저는 음악과 그림을 좋아했지만 그다지 두각을 나타낸 적은 없었고 4학년과 6학년 때의 학예회에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6학년 때 두 개의 교실을 텃던 사은회 사회가 제게 맡겨졌을 때 전교 선생님들이 다 참석한 가운데 아주 즐겁고 명랑하게 진행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1학년과 6학년 때만 우등상을 받았습니다.
제 유년 시절 저희 집에 작은아버지님의 사진이 걸려있어서 항상 의문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 아버님은 일란성 쌍둥이였습니다. 쌍둥이 작은아버님의 건강하심과 큰어머님(伯母)의 말씀에 의하면 제 아버님은 날뛰는 황소를 단신으로 제압한 장사였다는데, 제가 다섯 살 때 지금 같으면 손쉬운 수술로 치료될 급성맹장염으로 돌아가셨다고 그래요. 그 시절에는 시골에 병원도 없어서 하릴없이 돌아가신 거 같습니다. 제 아버님은 짓궂으면서도 책 읽기를 좋아하고 인정이 많았다고 제 큰어머님이 회고하셨는데 제게 짓궂은 악동 기질이 있음은 아마 아버님을 닮음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부안중학 때 한 번은 동네 어머니들의 모임에서 제 어머님이 장고를 치며 덩실덩실 춤출 때 저는 “어머니! 그거 보기 싫으니 빨리 나오세요.” 라며 강제로 어머님 손목을 붙들고 집으로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날 저의 춤추기는 어머님 쪽인가 합니다.
제가 사는 동네 청년들이 축구나 배구도 잘 했지만, 특히 매년 추석날 가설무대에 올리는 연극은 인근에서 아주 유명하여 동구(洞口)가 인산(人山)이 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중 3때 동네 연극에서 일제강점기에 중국에 있는 애국지사한테 연락하는 역이었는데 그 연극이 하도 잘 되어서 읍내 극장에서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보시곤 아주 깜짝 놀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부안중학교 브라스 밴드. 이해식은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clarinet). 1958. 12, 14. 부안초등학교 강당
한편 중학교 다닐 때는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를 모아서 자습하고 브라스 밴드에서 클라리넷을 불었습니다. 풍금을 치고 싶어서 먼 곳에 있는 교회를 다녔지만 막상 풍금을 만져볼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또한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그때의 청소년 농촌 활동인 4-H 구락부 부안군 웅변대회에서 저와 제 여동생이 우승하여 전주 웅변대회에 나갔을 때 처음으로 짜장면 맛을 보았습니다. 4-H란 1914년에 미국에서 설립되고 우리나라에서는 1947년에 조직된 농촌활동체로써 지(知 두뇌 Head)ㆍ덕(德 마음 Heart)ㆍ노(勞 손 Hands)ㆍ체(體 건강 Health)를 뜻하며 네잎 크로버가 심벌(symbol)입니다.
부엌의 부지깽이도 바쁘다는 농번기에 저는 학교에서 늦게 돌아오고 매주 밤낮으로 교회에 세 네 번씩 나가니 집에서 마땅하게 여길 리가 없지요. 거기에 또 나팔을 불고 다니니까 어머님께서 제게 “<사당질>을 갈 거냐?”고 한 욕설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사당질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지만 나중에 방송사에 다니면서 민속학을 공부해보니 사당이란 유랑극단 <사당패>(사당패 중에서 남자 사당만의 모임이 <남사당>(男寺黨)이다. 남사당의 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이 1964년에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됨)를 가리키는 건데 다시 말하면 풍물을 울리고 줄타기 하면서 영화 <왕의 남자> 처음에 나오는 그런 집단입니다. 사당패가 벌이는 인형극에는 홍동지도 나오고 아주 의심스런 인형극을 하는 그런 유랑극단을 말하는데, 제가 농번기에 집안일은 돕지 않고 나팔을 불고 다니니까 어머님이 “저놈이 사당질을 갈 놈이냐”고 뭐 그런 욕을 하신 거 같습니다. 아마 제 어머님은 사당패 공연을 보았을지도 모르지요. -이후 이러한 민속들은 정신적으로 제 작품의 아주 중요한 배경이 되며 학문적 전거가 되었습니다.
중 3때는 운동장 조회시간에 제가 애국가 지휘를 해서 그런지 학도호국단(그때의 학생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어서 학교 대표로 11월 3일 학생의 날에 서울운동장 전국학도호국단 대회에 참석했으며 중학 내내 우등생이어서 졸업 때는 우등생 대표였습니다.
전주사범학교 3학년(1961) 기독학생회 연극 동아리(이해식은 왼쪽에 가려짐).
고등학교 때는 기독교 서클(circle)에서 연극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혀가 짧아서 발음이 명확하지 않은데 연기자가 되지 않은 게 참 다행인 듯싶습니다.
고등학교는 전주사범학교에 가서 맘대로 풍금을 칠 수 있었음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남이라고 하겠습니다. 풍금을 열심히 연습하니까 아주 엄격하고 유명했던 오진동(吳鎭東 1927~1997) 음악 선생님께서 바흐의 오르간 푸게타(organ fughetta)와 벨기에 오르간 연주가이며 작곡가인 렘멘스(Jaak Nikolaas Lemmens 1823~1881)의 「기도」(Invocation)를 따로 lesson해 주셨습니다. 당시 이런 곡들은 선생님께서 내어주신 동경판 악보를 베껴서(筆寫) 공부했는데, 「기도」는 방송사에 근무할 때는 하몬드 오르간(Harmond organ)으로, 군악대 복무 시절에는 피아노로 복습했습니다. 이 「기도」의 중간에 있는 코랄 푸가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오진동 선생님이 방학 중에 한 교사 강습회에서 제게 바흐의 오르간 푸게타(fugetta)를 연주하게 했는데, 그때 한 선배가 “너 어떻게 풍금을 그렇게 잘 치냐? 그 노력과 시간이라면 피아노를 치는 게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리라.” 이 말 끝에 나는 선생님께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했더니 “그럼 피아노만 전공하기는 너무 늦었으니 작곡을 함께 공부해라.” 이렇게 해서 피아노와 작곡공부를 시작한 게 고교 2학년 때였고, 이어서 고교 3때 신흥대학교(지금 경희대학교)가 주최한 전국남여 고교음악콩쿠르 작곡부분에 나가서 입상했습니다. 지금도 고등학교 동기생들 모임에서 자주 음악선생님을 회자함은 그때 선생님의 교육이 엄격함에서인가 합니다. 두뇌가 명석한 학생들이었지만 오르간 실습시간만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주사범학교 때의 은사 오진동 선생님(오른쪽 1927~1997)
오진동 선생님의 악보를 베낀(筆寫) 렘멘스(Jaak Nikolaas Lemmens 1823~1881)의
오르간 악보 「기도」(Invocation) 첫 부분.
방학 때는 하숙집 아주머니가 “학생 제발 집에 좀 가라” 할 정도로 피아노만 연습함에 고향 친구들은 나를 볼 수 없어서 “어머님 위독”이라는 거짓 전보를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3학년 때 서울대 작곡과 입시에서 1차 합격하였지만 2차 턱걸이 체능에서 낙방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턱걸이를 못해요. 그래서 제 집사람의 농담이 “영화에서처럼 나를 한번 안아서 침대에 놓는 장면을 연출해 보세요.”이지만 이건 지금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사범학교에서 하도 공부를 안 한데다가 시험 때는 비어 있는 피아노실에서 살았기 때문에 저의 졸업 석차는 최하위였습니다. 따라서 졸업과 동시에 초등학교 교사발령을 받지 못한 신세가 한 일 년 넘게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사이에 저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또 다른 고교 이득주 은사님이 지휘하던 전주 KBS 방송 합창단에서 피아노반주와 등사(謄寫) 사보를 하면서 지내다가 고창초등학교로 발령 받았습니다.
전주방송(KBS) 합창단 창립5주년 기념 합창 발표회 R. 슈만의 혼성합창 「유랑의 무리」.
지휘/이득주, piano/이해식. 1963. 전주 시공관.
고창초교에서 한 1년 4개월쯤 재직하는 동안 무용곡을 작곡하고 무용교사가 안무하여 경연대회에 나가서는 직접 피아노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은 비록 아동무용이었지만 훗날 저의 춤과 작품에 알게 모르게 관련된 거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작곡했던 무용곡의 모티브(motive)가 30여년 후에 무당(shaman)의 정신세계를 상상한 피리와 실내악 「바람의 여자」라는 작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피리 solo와 현악기 거문고ㆍ가야고만 편성된 작은 협주곡인데, 널리 알려져 있진 않지만 glockenspiel과 피리의 앙상블이 독특합니다.
고창초교에서 두 번째로 서울대학교 작곡과에 응시 하였지만 원체 공부한 밑천이 없던 터라 제2지망으로 국악과를 선택하여 고교 졸업 후 만 3년 만에 1965 학번이 되었습니다. 서울대 국악과는 제가 제도적으로 맺은 국악교육과의 첫 인연이었지만, 그 이전에 제가 태어난 곳에서 들어본 <육자배기>와 판소리 <쑥대머리>를 기억하며 출상(出喪) 뒤에 따라다니며 채보 하면서 농촌 민속악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대학 때 은사이신 정회갑 선생님께서 제 입시성적을 보니까 영어를 제일 못 했더래요. 그때 작곡과 정원이 15명이었는데 제가 16등이더래요. 저는 초등학교 교사가 될 사범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영어의 기회가 특별하지 않았음이 핑계임은 제 친구들 중에는 영어로 성공한 사람이 여럿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국악과에 진학한 제 전공은 <국악이론>이었습니다. 국악이론은 교양과정 2년 동안 국악이론과 서양음악작곡을 복수로 전공하다가 3학년 때 이 둘 중에서 택일하는 커리큘럼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악이론은 장사훈 선생님, 서양음악작곡은 정회갑 선생님이었고, 4학년 때 한만영 선생님에게서 채보를 배웠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학생들을 가르쳐 보니 국악이론이 다른 전공보다 곱절을 더 공부할 기회임을 충분히 활용하거나 인식하지 않는 거 같습니다.
제8회 동아음악 콩쿠르 시상식에서 수상자 대표로 수상소감을 말하는 이해식. 오른쪽에 서있는 이는 김상만 동아일보 사장, 가운데 앉은 이가 장사훈 선생님, 1965. 11. 5. 동아일보사/서울.
2005. 5. 15. 스승의 날에 정회갑 선생님 아파트에서
언젠가는 외국에서 유학한 선생님의 수업에서 제 전공이 피아노인줄 알았다가 국악임을 알고 놀란 적이 있었는데, 피아노를 가지지 않은 저는 대학생활 4년 내내 국악공부보다는 거의 피아노 학습으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피아노에 매달렸음은 서양음악작곡은 절반 이상을 피아노로 공부할 수 있음에서였고 작곡은 piano figuration으로 시작함에서인데 실제로 제 작곡의 힘은 피아노 학습에서 나옵니다. 잘은 아니지만 성악ㆍ기악하는 친구들과 반주연습을 자주 했음도 큰 공부였습니다.
한편 4학년 후반에 이르니까 국악공부에 소홀했음이 후회됨은 저의 국악공부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어서 장사훈 선생님께 “선생님 이제 국악이 뭔지 조금 알 거 같아요.” 라고 실토한 적이 있습니다.
저의 대학 4학년인 1968년에 국악작곡이 신설된 제5회 동아음악콩쿠르에 나가서 동아음악콩쿠르 최초로 서양음악작곡ㆍ국악작곡이 동시당선 되었습니다. 그 뒤로 국악을 전공하는 몇몇 후배들이 동시당선은 아니지만 연차로 당선된 적이 있습니다.
1969년 2월 졸업 직전에 저는 남산 KBS로 권오성 선배를 찾아가서 유명한 평론가이며 음악계장이던 이상만 선배를 만났습니다. 여기서 권 선배의 배려로 내 작품들을 녹음하여 라디오 제2방송 <청소년음악회>로 방송하였습니다. 저는 이 인연으로 즉시 <문화공보부 중앙방송국 라디오 제작2부 음악계>에 인턴으로 들어가서 그해 5월에 정규 특채시험을 거쳐서 제가 영남대학교로 갈 때까지 10년 동안 KBS 라디오 국악 프로듀서로 재직했습니다. 그때 프로듀서의 공무원 명칭은 <연예사>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녹음기를 끼고 지낸 KBS 10년이 지금은 제 청춘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흑산도와 홍도를 답사하는 권오성 선배와 이해식(왼쪽). 1974. 4. 15. Minolta SRT 101.
제2회 대한민국 방송상 음악상 수상(문화공보부 장관상. 장관/이원경).
1974. 10. 30. 나는 KBS시절에 수시로 상을 받아서 내 와이프는 나를
<상 받는 선수>라고 불렀는데 이 상들은 거의 민요 필드워크와 관련된다.
당시 KBS 라디오 음악계에는 유능한 선배 프로듀서들이 오순도순 지냈는데 그중에 특히 권오성 선배는 명문명필(名文名筆)이었고 매년 다양한 방송사업을 벌인 elite producer였습니다. 나는 권오성 선배의 영향으로 토속민요에 눈 뜨고 국악방송을 위한 지방출장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권 선배는 “내가 호남지방을 많이 답사했으니깐 자넨 한번 영남지방으로 해보게.” 이 말과 함께 저는 영남으로 토속민요 수집을 위한 본격적인 필드워크(fieldwork)에 올랐고 그래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학교도 지금 영남대학교로 갔습니다. 이렇게 제가 KBS 라디오에 재직하는 동안 권 선배와의 국악 담론으로 많은 공부가 쌓이고 국악인들과의 직접 만남은 그야말로 알속 있는 공부였습니다. 저의 국악공부는 KBS에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간에도 제 뇌리에 살아서 숨 쉬며 제 작품에 반영되고 소재가 되는 토속민요는 곧 권오성 선배로부터의 비롯됨입니다. 언젠가 제 집사람이 제게 “상 받는 선수”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음은 제가 수시로 여러 가지 상을 받아서였는데 이 상들은 거의 토속민요와의 관계였습니다.
권 선배는 또 1979년 12월에 내가 제작한 <시나위>와 내 작품 「합창과 국악관현악을 위한 밧삭」(外數)을 들고 쿠알라 룸푸르(Kuala Lumpur)에서 열린 제13차 아시아방송연맹(ABU/Asian Broadcasting Union) 방송콩쿠르에 참석하여 각각 <전통음악 우수상>과 <전통음악에 의한 작곡 특별상>을 받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의 어려웠던 인턴 시절과 제가 대학으로 옮길 때도 남모르는 많은 도움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내 KBS 시절은 바로 권 선배와의 생활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KBS-Radio에서 근무하다가 몽당연필과 휴대용 오선지를 꾸려서 군에 입대했습니다. 아까 저의 가야고 독주곡 「구름터」는 신병훈련소에서 작곡했는데, 그밖에도 저는 군복무 동안에 몇 곡의 작품을 발표 했습니다. 공병 1785부대에서 작곡한 「당산」(堂山)은 <당산면>ㆍ<당산리> 등, 우리나라 지명(地名)으로도 숱한 제 어렸을 적의 당산굿 민속을 연상한 작품입니다. 타악기 풍물(風物)을 점묘적(點描的 pointilism) 수법으로 구사한 「당산」은 제 최초의 합주곡이며, 이후 저의 일련의 굿 작품은 「당산」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제가 1785부대에서 「당산」을 발표하고 육군본부 군악대로 전출하는 데에 그때 전우들 중에서도 특히 A병장의 도움이 많았음을 기억합니다.
이해식의 육군본부 군악대 시절. 1972. 10. 1.
여의도 국군의 날 행사장. 나는 육군군악대에서
합주곡으로 「원풍」ㆍ「춤거리」 등의 작품을 썼다.
저는 육군본부 군악대로 와서는 합주곡 「원풍」(院風)ㆍ「춤거리」를 작곡했습니다. 이와 같이 군복무 중의 제 작품들이 초연되는 데는 한만영 선생님의 전폭적이 지원으로 가능했습니다. 한만영 선생님은 제가 제대 후에 KBS에 복직하여 국악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데도 중요한 연사(演士 출연자)였습니다.
오래된 사진: 이해식 작곡 ‘「Contrast and Frisk」(clarinetㆍpianoㆍjing).
제3회 서울음악제 당선작품. clarinet/김동진, piano/김세정, jing/최승준.
1971. 10. 5. 명동국립극장/서울.
제가 입대하기 전에 KBS에 다니면서 작곡해 두었던 중주곡 「Contrast and Frisk」(clarinetㆍpianoㆍjing)는 지금 제 집사람이 제3회 서울음악제 공모에 제출하여 당선된 작품입니다. 곡목 「Contrast and Frisk」는 헝가리의 민속춤(gypsy dance) 차르다스(Czardas)에서 얻었는데 차르다스는 느리고 빠른 라슈와 프리스카(Lassu & Frissca)로 되어 있습니다. Lassu and Frisca=Contrast and Frisk입니다. 저는 라슈를 마치 gypsy들의 진양조라고 생각하면서 이 작품을 썼습니다.
아까 윤신향 선생님이 “아주 본론으로 들어가서 1980년대에 영남대학교에 근무하면서 조용하게 굿(?)음악을, 1986년에 순수하게 무용을 위한 「흙」이란 작품”을 언급했습니다.
먼저 굿 작품은 윤선생님이 [오늘의 창작음악 어떻게 볼 것인가?], “작곡가 이해식과의 만남” 8쪽에 소개한 저의 작품목록 가운데 「굿을 위한 피리」ㆍ「들굿」(野祭 1983)ㆍ「산굿」(山祭 1984)ㆍ「어방굿」(漁坊祭 1985)ㆍ「향발굿」(響鈸祭 1985)ㆍ「대굿」(竹祭 1985)ㆍ「국악관현악을 위한 굿연습」(1986)ㆍ「종굿」(鍾祭 1986) 등은 제가 군대에서 발표한 「당산」(1970) 이래의 굿 음악 작품들입니다. 저의 일련의 굿 시리즈는 제가 영남대학교에 자리 잡으면서부터인데, 거의 서울대학교 국악과 정기연주회를 지휘한 이성천(1936~2003) 선생님의 위촉이었고 그 최초가 「들굿」입니다. 이성천 선생님은 한만영(1935~2007) 선생님에 이어서 저의 작품사(作品史)에서 아주 중요한 지휘자입니다. 이후에 이상규ㆍ임평용 교수가 제 작품 지휘에서 역동성을 살린 역량 있는 지휘자들입니다.
굿은 한국 사람들의 독특한 예배의식이며 보통 <굿놀이>라고 합니다. 굿놀이의 중심에 춤이 있습니다. <놀이>와 관련하여 네덜란드의 학자 요한 호이징하(Johan Huizinga)는 <인간의 놀이>라는 뜻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Johan Huizinga(權寧彬 譯), [호모 루덴스], 서울: 弘盛社, 1981, 또는 金潤洙 譯, 놀이와 문화에 관한 한 연구 [호모 루덴스], 서울: 까치, 1981)에서 놀이는 창조의 근원이라면서, 현대 인류가 망각한 고대의 신성하고 삶이 충만했던 놀이 정신의 회복을 주장합니다. 인간의 모든 삶을 놀이로 봅니다. 나는 이 책을 읽은 후에 내 작품의 초점을 춤과 놀이로 잡는 학문적 전거(典據)로 삼았습니다.
제 작품들은 굿에서 춤으로 전이됩니다. 윤 선생님이 제시한 “작곡가 이해식과의 만남” 중에서 춤 제목들을 보면, 「춤거리」(1973)ㆍ「사위 제2번」(1977)ㆍ「디스코」(DISCO 1987)ㆍ「춤을 위한 支와 干」(1988)ㆍ「춤을 위한 국악연습」(1989)ㆍ「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1990)ㆍ「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제2번」(1990)ㆍ「길춤」(1992)ㆍ「성주춤」(城主舞 1992)ㆍ「춤맞이」(1993)ㆍ「국악관현악을 위한 디스코」(1999)ㆍ「등장춤」(登場舞 1998)ㆍ「축제를 爲한 춤피리」(1997)ㆍ「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두레」(2000)ㆍ「Piano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질내기’」(2004), 그밖에 「피아노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춤두레 제2번」(2007)이 있고, 탱고를 위한 「플루트와 국악관현악 위한 ‘두레맞이’」ㆍ「합창과 국악관현악을 위한 ‘두레사리’」와 같이 춤이 들어가지 않은 작품도 모두 춤곡입니다. 윤선생님이 제 작품은 거의 국악관현악이라고 했는데 그 중에서도 춤곡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 작품들은 제가 춤추는 기간에 작곡했습니다.
J. 호이징하에 의하면 악기연주도 놀이이고 글짓기(作詩) 곡조 짓기(作曲)도 놀이입니다. 저는 영남대학교에서 아까 윤선생님의 말씀대로 그야말로 ‘조용하게’ 굿놀이 춤놀이- 곡조 짓기에 몰두하며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건강을 해쳤습니다.
저의 춤음악에서 아주 중요한 무용가가 있는데, 바로 현대무용가 정귀인 교수(부산대)입니다. 그는 제게 「흙」(1986)이라는 춤음악을 위촉한 이래 나의 작품으로 「갈숲」(1989)ㆍ「청산별곡」(靑山別曲 1989), 제1회 대구무용제 대상작품인 「바람의 말」(1991)ㆍ「무천」(舞天 1992)(이해식 작곡 무용곡 무천」(舞天): 이해식의 여러 작품을 녹음 편집하여 정귀인 안무로 1992. 11. 25. 부산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부산시립무용단이 제28회 정기공연) 등을 안무한 역량 있는 무용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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